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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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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떡’ 그 역사속으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부르고 있는「떡」이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옛말의 동사「찌다」가 명사화되어「떼기」➝「떠기」➝「떡」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떡이란「찐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 떡의 역사

떡의 역사는 원시농경사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시루가 다량 출토되는 청동기 후기부터 본격적인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고구려 초기 유물인 황해도 안악고분벽화에서는 시루에 곡물을 찌는 그림이 등장하는 등 한반도에서는 곡물을 찌는 조리법이 일찍부터 발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농업과 함께 떡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문헌상의 기록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에는 ‘떡을 깨물어 유리왕의 치아수가 많아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에 <열전 백결선생>에서는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설에도 떡을 치치 못하는 아내를 위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떡의 분류

떡 문화의 본거지는 동남아시아 대륙으로 한국, 중국 서남부, 일본, 인도 아삼 지역 등에 분포한다. 이는 찰벼재배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한자로 떡을 병이(餠餌)라고 하는데 중국은 주로 밀가루로 만들어 굽거나 찌거나 튀긴다.

일본은 찹쌀을 주재료로해서 쪄서 만들며, 우리나라는 멥쌀가루에 고물을 얹은 시루떡이 기본형이다.『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李用基)』에서는 떡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떡은 병이(餠餌)라 하였으며 떡이란 것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합하는 것이니 고와 이(餌), 자(姿)와 투(偸), 탁(飥)이 모두 병(餠)이라 이르나, 쌀가루를 찐 것은 이(餌)라고 하고, 가루를 하지 않고 쌀을 쪄서 치는 것은 자(姿)라 하며, 기름에 지진 것은 유병(油餠)이라 한다.

또 꿀에 반죽한 것은 당궤(餹鐀)라 하고, 가루를 반죽하여 국에 넣고 삶는 것은 박탁(餺飥)이라하며, 찰가루를 쪄서 둥글게 만들어 가운데에 소를 넣은 것을 혼돈(餛飩)이라 한다.

쌀가루를 엿에 섞은 것은 교이(餌)라 하고, 꿀에 삶는 것은 탕중뢰환(湯中牢丸)이라 하며 밀가루에 술을 쳐서 끈적거리게 하여 가볍게 하는 것은 부투(餢) 또는 유어(饇)라 한다. 또한 떡을 얇게 하여서 고기를 싼 것은 담(餤)이라 하고, 밀가루를 부풀게 하여 소를 넣은 것은 만두(饅頭)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시루떡은 이(餌)의 종류요, 찹쌀인절미는 자(瓷)의 종류요, 화전은 유병(油餠)의 짝이요, 꿀떡은 당궤(餹鐀)의 남아지요, 골무떡[단자(團資)]은 혼돈의 벗이요, 떡국[탕병(湯餠)]은 박탁의 한 종류요, 원소병은 뢰한이 변한 이름이요, 증편과 상화병은 부투의 다른 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떡을 가리키는 말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밀가루가 보급된 한대(韓代) 이후에는 떡을 가리키는 용어가 병(餅)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떡을 의미하는 한자는 쌀을 위주로 떡을 만들었을 때는 이(餌)나 자(瓷), 밀가루를 위주로 떡을 만들었을 때는 명칭의 구별 없이 떡이라고 하며 한자인 경우 주로 병(餠)으로 표현하고 고(糕, 餻)로도 쓰인다.

한편, 문헌상 떡이란 글자가 나타나는 조리서는 한글 조리서인(규곤시의방(일명 음식디미방))이며 여기서는 떡을 편이라 칭하고 있다. 떡이란 호칭은 (규합총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 삼국시대 이전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떡을 먹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 인 부족국가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떡의 주재료가 되는 곡물이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떡의 제작에 필요한 갈판과 갈돌, 시루가 당시의 유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 데 쓰이는 갈돌이, 경기도 북변리와 동창리의 무문토기시대 유적지에서는 갈돌로의 발전 이전 단계인 돌확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나진 초도 조개더미에서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는 구멍이 여러개 난 시루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음식이라면 시루떡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루떡 및 시루에 찐 떡을 쳐서 만드는 인절미, 절편 등도 보인다. 다만 아직 쌀의 생산량이 많지 않았으므로 쌀 외에도 조, 수수, 콩, 보리 등 각종 잡곡류가 다양하게 이용 되었을 것이다.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자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쌀을 주재료로 하는 떡이 더 한층 발전할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는 시루에 무엇인가를 찌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으며 여러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는 시루가 출토되고 있기도하다. 이와 더불어「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문헌에는 떡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당시의 식생활 중에서 떡이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년)조에는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 떡을 깨물어 생긴 잇자국을 보아 이의 수가 많은 자를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같은 책 백결 선생조에는 신라자비왕대(458~479년) 사람인 백결선생이 가난하여 세모에 떡을 치지 못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한 이야기가 나온다.

깨물어 잇자국이 선명히 났다든지 떡방아 소리를 냈다든지의 기록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떡은 찐 곡물을 방아 등에 쳐서 만든 흰떡, 인절미, 절편 등 도병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백결선생이 세모에 떡해먹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하여 당시에 이미 연말에 떡을 하는 절식 풍속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고려시대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역사상 최고조로 번성하게 된다. 불교문화는고려 인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쳤으며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육식의 억제와 음다(飮茶)풍속의 유행은 과정류와 함께 떡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와 더불어 권농 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은 경제적 여유를 제공하여 떡의 발전을 더 한층 촉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크게 다양해져 주목된다.「거가필용」에 ‘고려율고’ 라는 떡이 나오는데, 한치윤의「해동역사」 에는 고려인이 율고를 잘 만든다고 칭송한 견문이 소개되고 있다.

율고란 밤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꿀물에 내려 시루에 찐 일종의 밤설기이다. 설기떡을 찔때 꿀물을 내리면 공기가 고르게 들어가 떡의 탄력성이 커지고 쉽게 굳지 않으므로 상당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수광은 그의 저서「지봉유설」에서 상사일(上巳日)에 청애병(靑艾餠)을 해먹는다고 하였다.

어린 쑥잎을 쌀가루에 섞어 쪄서 만든다고 하였으니 쑥설기인 셈이다.이외에도 송기떡이나 산삼설기 등이 등장한다. 즉, 이전에는 쌀가루만을 쪄서 만들 던 설기떡류가 쌀가루 또는 찹쌀가루에 밤과 쑥등을 섞어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농업기술과 조리가공법의 발달로 전반적인 식생활 문화가 향상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떡의 종류와 맛도 더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궁중과 반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떡은 사치스럽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곡물을 쪄 익혀 만들던 것을 다른 곡물과의 배합 및 과실, 꽃, 야생초, 약재 등의 첨가로 빛깔, 모양, 맛에 변화를 주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요리 관련서들에는 매우 다양한 떡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이러한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각 지역에 따라 특생 있는 떡이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관혼상제의 풍습이 일반화되어 각종 의례와 크고 작은 잔치, 무의(巫의) 등에 떡이 필수적으로 쓰였다. 또 고려시대에 이어 명절식 및 시절식으로의 쓰임새도 증가하였다.

이때 주로 만들어진 설기떡류로는 기존의 백설기, 밤설기, 쑥설기, 감설기 외에 석탄병(惜呑餠), 잡과꿀설기. 도행병(桃杏餠), 석이병, 괴엽병(槐葉餠), 무떡, 송기떡, 승검초설기. 막우설기, 복령조화고, 상자병, 산삼병, 남방감저병, 감자병, 유고, 기단가오 등이 등장하였다.

시루떡 또한 팥시루떡, 콩시루떡 외에 무시루떡, 꿀찰편, 청애시루떡, 녹두편, 거피팥녹두시루편, 깨찰편, 적복령편, 승검초편, 호박편, 두텁떡, 혼돈병 등이 나타났다. 찌는 떡뿐만 아니라 치는 떡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인절미는 찹쌀을 쪄서 치는 단순한 형태였으나 점차 쑥, 대추, 당귀잎을 넣고 쳐서 색다른 맛을 음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은 개피떡이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병류도 차수수전병에서 더덕전병, 토란병, 산약병, 서여향병, 유병, 권전병, 송풍병 등 재료의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경단 및 단자류는 조선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떡의 종류이다.

떡은 궁중과 반가를 중심으로 더욱 사치스럽게 발전하여 조선시대 음식관련 조리서에 등장하는 떡의 종류만 해도 무려 198가지에 이르고, 떡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의 가지수도 95가지나 된다.

특히 궁중에서는 사치의 정도가 더욱 심하여 각색메시루떡, 각색차시루떡, 각색조악, 화전, 각색단자등을 높이 1자 8치로 높게 고여서 연회에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어 당시 조선후기를 휩쓸었던 사치 풍조가 떡에도 반영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1670)’ 에는 석이편법, 밤설기법, 전화법, 빈잡법, 잡과법, 상화법, 증편법, 섭산산법 등 8가지 떡 만드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고 ‘규합총서(1815)’ 에는 석탄병, 백설기, 혼돈병, 복령조화고, 도행병, 무떡, 신과병, 토란병, 송기떡, 서여향병, 석이병, 상화. 밤조악, 대추조악 등 27종의 떡 이름과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 조리서 중 가장 많은 떡이 기록된 조리서는 1924년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이다. 떡의 종류 중 찌는 떡이 37종, 치는 떡이 19종, 삶는 떡이 7종, 지지는 떡이 16종, 떡 곰팡이 안 나는 법 등으로 약 80여종에 이른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 1924.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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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후

19세기말 이후 진행된 급격한 사회변동은 떡의 역사마저 바꾸어 놓았다. 간식이자 별식거리 혹은 밥 대용식으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던 떡은 서양에서 들어온 빵에 의해 점차 식단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생활환경의 변화로 떡을 집에서 만들기보다는 떡집이나 떡방앗간 같은 전문업소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던 떡의 종류는 전문 업소에서 주로 생산되는 몇 가지로 축소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떡은 아직도 중요한 행사나 제사 등에는 빠지지 않고 오르는 필수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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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강원도농업기술원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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