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는 다양하다
김경미 명인을 찾은 그 날은 때마침 김장 날이었다. 온 가족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김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풀죽을 쑤고 양념을 버무리는 분주한 가족의 손길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선조들이 김장에 담고자 한 숨은 메시지가 있을 것만 같다.
오랫동안 한국 전통음식과 김치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명인이 정의하는 김치는 의외로 단순 명료하다. “김치는 다양해요. 또 김치를 만드는 데 특별한 재료는 필요 없어요. 김치란게 종합적으로 어울리는 채소 발효음식이기 때문이죠.”
그의 말대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재료는 김치가 될 수 있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거기에 마늘, 생강, 젓갈 등을 넣고 숙성시키면 김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젓갈이나 고춧가루가 없어도 김치가 될 수 있을까? 이 의문 역시 명인은 명쾌하게 정리 한다.
“없는 재료를 굳이 넣지 않아도 돼요. 왜냐하면 김치 담그는 법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에요.” 말레이시아의 새파란 푸른 망고로 깍두기를 만들고 호박고구마로 김치를 만드는 명인의 행보가 뭐든 김치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있던 셈이다.
명인은 덧붙였다. “김치를 한 가지로만 생각하지 않길 바라요. 만들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김치를 담글 수 있죠.”
♣ 새로운 발견
배추김치를 담그는 김경미 명인의 김장법이 독특하다. 무 김치도 아닌데 양념에 들어가는 무의 크기가 크고 넓적 하다. 양념에는 으레 무채가 들어간다. 이 무의 역할은 김치의 맛을 더욱 시원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으로, 양념에서 무는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재료다.
명인은 무를 빼지 않고도 양념이 깔끔하면서 주재료의 맛을 살릴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양념을 배춧잎에 직접 버무리지 않고 넓적하게 썬 무에 버무린 뒤 그 무를 배춧잎 사이에 켜켜이 끼워 넣었다. 그리고 배추에 양념을 살짝 바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담금법은 배추김치가 정갈하면 서도 배추와 무가 숙성되면서 서로 어우러져 맛깔스럽고 시원한 맛을 낸다고 한다. 이렇게 배추김치를 담그기까지 오랜 시간 연구했을 만큼 무를 켜로 넣은 김치가 익었을 때의 맛을 상상하자 절로 군침이 돈다.
“새로운 요리의 발견이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던 프랑스 최고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처럼 명인 역시 새로운 발견에 행복하리라 짐작해 본다.
♣ 전라도식 김치
2019년 10월에 있었던 광주·전남 토속 김치 전시에서 김경미 명인이 출품한 김치는 다름 아닌 전라도식 배추김치와 무동치미였다. 서울에서 자란 그는 다른 김치도 많은 데 왜 전라도식 김치를 고집했을까?
그 이유를 묻자, “김치라는 게 지역 특산물을 이용하는데, 식재료가 풍부한 전라도 김치는 양념만으로도 다양한 채소와 젓갈을 사용 해 김치를 담가요. 그 자체만으로도 풍성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지나침이 없는 점이 전라도 김치의 특별함”이라고 명인은 말한다. 명인의 말마따나 음식 가운데 가장 풍성하면서도 불필요한 것 하나 없는 김치야말로 그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 조상의 메시지
지금이야 사철채소가 나오지만, 채소가 잘 나지 않았던 겨울을 대비해 담가 먹었던 조상들의 김장은 상당히 지혜로웠다. 김치라는 한 가지 음식을 통해 여러 채소를 골고루 섭취하게 해 줬고, 탄수화물만 먹었을 때 부족했던 영양분을 보충해 주었다.
또 소화제 같은 약이 없었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김치라는 발효음식을 통해 가족의 건강까지 지킬 수 있었다. 이렇듯 김장은 영양적으로나 환경적 으로나 큰 의미를 지닌 한국 전통문화의 행사다.
도란도란 둘러앉아 배추와 무 더미를 늘어놓고 양념을 버무리면서 이야기와 웃음을 나누는 김경미 명인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단순히 겨울을 대비한 저장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온정을 함께 버무리고 나누라는게 선조들이 김장에 남긴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