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철기시대
인류의 문화는 도구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나뉜다. 구석기시대에는 수렵과 채집에 의해 식품재료를 구하였으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로부터 원시적이지만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미미한 형태이었지만 철기가 도입된 기원전 4세기경부터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조, 기장, 수수, 보리, 벼, 콩, 팥 등의 생산이 늘어났다. 또한 유목계의 영향을 받아 가축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때 형성된 부족국가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있다.
부여는 축산을 중시하였으며, 고구려는 불고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고기구이로 맥적(고기를 미리 장과 마늘로 조미하여 직화에 굽는 음식)을 먹었다. 고대문헌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보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이라는 대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춤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예의 무천’이라는 의식 후에도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음료로서 술이 우리의 생활에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수 있다.
♣ 삼국~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에는 철기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농경기술이 혁신되어 벼농사가 활발하게 보급되었으며 한국 식생활의 구조와 체계가 성립되었다. 쌀을 주식으로 먹고 각종 저장용 발효식품과 철로 만든 그릇을 이용한 볶음음식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김치, 육장, 어장, 두장, 젓갈, 식혜, 막걸리 등의 발효식품이 나타나면서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는 반상차림이 일상식사의 기본 양식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신라나 백제에서는 살생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 불교가 식생활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고구려인들은 콩을 경작하여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 후 소금을 섞은 발효식품을 만들었는데, 기원전 1000년대 초의 유적지인 함북 회령군 오동의 유물에서 콩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우리 조상들이 콩으로 장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의 주요 식량의 생산과 상용 음식의 조리가공, 일상식의 기본양식, 주방의 설비와 식기 등 한국식생활의 체계가 성립되었다. 밀은 지중해 지역에서 기원전 7000년경에 재배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
이 시대의 식생활을 보면, 일상식은 주식, 부식 구성의 상차림으로 정착했으며 하루 세끼 식사와 반주를 하였다. 중농 정책으로 곡물이 증산되고, 무쇠솥의 보급으로 밥 짓기가 일반화 되었다.
삼국, 통일 신라시대에 술에 관하여「삼국사기」,「삼국유사」들에 미온(美繼), 지주(旨酒), 요례(備禮) 등의 말이 나오는데, 미온, 지주는 좋은 술, 요례는 막걸리나 예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미 좋은 술이 많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음식문화는 당송의 영향을 받아 더욱 다양해졌으며 식생활 문화의 전반적인 체계와 구조가 확립되었다. 전반기에는 권농정책(勸農政策)으로 농업이 성행하였다.
음식문화는 불교사상에 바탕을 두어 육류 대신 채소와 곡류를 이용한 음식이 많았으며 향신료와 기름을 이용한 음식과 사찰음식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육류를 이용한 음식이 발달하고 돼지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을 먹었다.
또한 곡물 음식으로 쌀 뿐만 아니라 보리와 피 등을 재배하였고 약밥과 팥죽도 등장하였으며 간장, 된장, 술, 김치 등의 저장식품도 제조되어 이전보다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먹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육식 절제와 근검절약을 선도하고 토지 정책을 개선하였으며 개간 사업과 양조법을 확대하였고 김치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주류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 많은 외래주가 유입되었으며 술을 증류하는 기술이 도입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주류들이 나타났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없었 지만 16세기 이후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주의(崇儒主義)가 양반 문벌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식생활에 큰 영항을 끼쳤다.
조선시대는 식품의 생산기술 및 유통이 발달하고 지리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 향토음식이 형성되어 식생활 문화의 향토적 발전을 이루었다. 가부장적 가족윤리에 맞추어 통과의례 범절이 엄해지면서 의례음식의 조리기술과 상차림이 발달하였다.
상차림은 주식과 부식을 분리하였으며 신분이나 형편에 따라 3첩 반상부터 12첩 반상까지 다양하였다. 목적에 따라 평상시에는 반상, 죽상, 면상, 주안상, 다과상 등을 마련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의례적인 상을 차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시풍속에 따른 시식과 절식도 즐기고 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향토음식도 등장하였다. 궁중음식이 발달하면서 조선 왕조의 후기에 비로소 한식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고추, 호박과 같은 식품이 재배되어 식문화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음식은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것 이상으로 우리 생활문화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항음주례는 세종대왕이 주나라 예법을 바탕으로 그 절도를 가다듬어 향교나 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과목으로 가르치던 여섯 가지 예법 중의 하나로 어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예의절차를 밝히면서 술을 마시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술은 음식 가운데 가장 고귀한 음식물로서 우리 민족은 술 자체 뿐만 아니라 술을 따르는 그릇까지도 중시하여 특별히 제작하였다. 또한 술을 마시는 예절을 소학에서 가르침으로써 누구나 술을 마시는 범절을 깍듯하게 하였다25).
♣ 개화기 이후
개화기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없었으나 각국과의 통상조약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상호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외국 식생활 문화가 유입되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는 서구 문명의 유입에 의해 서양음식이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식량난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솔잎, 도토리, 콩잎, 마 등의 구황식품과 같이 다양한 식량자원을 자연에서 채취하여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일본의 제빵 기술자들이 들어오게 되어 양과자점, 제과점이 생겼으며 적은 양이지만 제분, 제면, 청량음료, 통조림 등의 외래 식품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50~1953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경작지의 초토화와 인력부족으로 농토는 황폐해지고 식량은 부족하여 감자류 등으로 연명하여 영양이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일본, 서양의 풍속이 전해져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이 점차 변화되어 갔다.
전쟁 중에 굶주린 한국인에게 미국 에서 원조 물자로 들어온 분유의 무상배급은 우유를 먹지 않는 민족이었던 한국인들로 하여금 우유를 먹기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대량 식량원조는 한국인들의 식습관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1963년에는 라면이 들어와 분식장려 운동에 편승하여 주식대체용 혹은 간식용으로 그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제빵, 제과산업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1979년에는 곡류, 감자 등 식물성 식품의 소비량이 줄어들고 육류, 난류, 어패류 등 동물성 식품의 소비가 증가하여 서구식 식생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고도의 경제성장과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국내의 농업, 축산업, 낙농업, 원양 어업이 개발되어 질 좋은 식품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요인의 변화는 국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가치관을 변화시켜 식품산업과 외식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3년 이후부터는 쌀의 재고량이 늘기 시작하고 점차 시구식 식생활로 인한 생활습관병 증가 등 새로운 식생활 문제가 발생함에 따과 1990년대에 와서는 쌀 중심의 식단과 우리 음식의 우수성에 대한 재조명과 더불어 한국형 식생활 정립이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지방화시대가 도래하면서 각 지역에 있는 향토음식이 지역문화와 연계하여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건강지향, 천연지향 등의 식품소비 트렌드와 한류열풍에 부응하여 우리 한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한식세계화가 부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