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갈비는 토막 친 쇠갈비를 양념하여 구운 음식이다. 재료로는 연하고 좋은 어린 암소갈비가 적당하며, 갈비의 맛을 국물 등에 흘려 없애지도 않고 약간 탄 듯한 구이 특유의 독특한 향기가 기호를 자극하므로 그 맛이 일품이다.
맛있게 잘 조리된 갈비구이는 빛이 검붉고 기름이 잘잘 흐르는 듯하며, 약간 단맛이 돌면서 먹을 때 고기가 뼈에서 잘 떨어져야 한다. 덜 구워져서 떨어지지 않으면 먹기도 어렵고 맛도 덜하다.
만드는 법은 우선 암소갈비로 골라서 기름덩어리가 너무 많이 붙었으면 칼로 떼어낸다. 갈비는 7㎝ 정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양면에 약 1㎝ 간격으로 뼈에까지 닿도록 깊게 칼집을 넣어서 파·마늘·참기름·간장·깨소금·설탕·후춧가루 등을 함께 섞은 양념장에 재어두었다가 약간 센 중불에 굽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에 석쇠를 놓고 석쇠가 단 다음 빨리 구워내야 맛이 있다. 지방분이 녹아 지글지글하면서 겉의 단백질이 응고되어 내부의 성분이 흐르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 뼈에 붙은 힘줄이 오그라들 정도로 구워 뜨거울 때 대접한다.
미리 구워두었다가 대접해야 할 때는 구운 것을 합에 담고 꼭 덮어서 따뜻한 곳에 묻어두었다가 썼으나, 이럴 때는 수증기에 의해서 수분이 생기므로 좋지 않은 방법이다. 굽는 요령은 석쇠를 뜨겁게 한 다음 갈비를 놓고 한쪽이 거의 익었을 때 뒤집어 다른 한쪽을 굽는다.
이때 갈비를 재었던 양념장을 바르면서 구우면 윤도 나고 맛도 있고 먹음직스럽다. 갈비구이는 즉석에서 구우면서 먹는 것이 가장 맛이 좋으며, 각자에게 조그만 접시를 주어 거기에 익은 것을 한개씩 덜어놓고 뜯어먹도록 한다.
이 맛있는 갈비구이의 특별한 대명사로 쓰이는 것이 바로 수원갈비이다. 일설에 의하면 수원갈비의 시작은 화춘옥이라는 음식점을 처음 열었던 이귀성에 의해서라고 한다. 이귀성은 1930년 예의 수원 영동시장에서 형 이춘명과 본인, 그리고 동생과 함께 ‘화춘 제과’라는 과자점을 열었다.
그러다 해방이 된 1945년 11월경에 이귀성이 혼자서 독립하여 27평의 2층 목조건물에 ‘화춘옥’이란 해장국집을 개업했다.
처음에는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는 것으로 인기를 모았지만 해장국 장사로 크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결국 이귀성은 이듬해인 1946년 갈비에 양념을 하여 숯불에 구워내는 갈비구이로 메뉴를 바꾸었고 이것이 수원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던 이귀성은 그곳에서도 갈비 기술을 전수하여 ‘해운대갈비’를 탄생시킨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수원으로 돌아온 이귀성은 1953년 영동시장 싸전거리가 화재로 불타자 수원시에서 제공한 팔달로 근처로 옮겨서 영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씨 좋던 이귀성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손님들에게 외상을 자주 주면서 이익을 크게 보지 못하고 곤경에 빠졌다. 결국 1960년대 초에 공무원이었던 아들 이영근이 화춘옥 경영을 맡았고, 그의 전문성으로 갈비 집은 제 궤도에 올랐다.
점차 소문이 나자 새마을운동을 격려하고 벼 품종을 개량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도 수원만 오면 화춘옥의 단골이 되었다. 결국 화춘옥 덕택에 팔달로 근처는 갈비집 촌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1979년 영동시장이 도시개발로 인해 사라질 처지에 이르자, 오늘날 수원갈비집들이 모여 있는 법원사거리 근처로 대거 이전을 했지만 그 명성에는 변함이 없다. 화춘옥의 수원갈비는 간장으로 양념을 하지 않고 소금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원래 쇠고기구이는 조선간장을 주된 양념으로 조리했다. 그래서 지금도 수원갈비는 집집마다 간장갈비와 소금갈비가 섞여 있다. 사실 오늘날 수원갈비는 그 값이 너무 비싸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 맞추어 수원갈비 집을 찾으면 갈비가 산처럼 쌓인 갈비탕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당연히 정해진 그릇 수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놓치면 이 갈비탕을 맛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이것을 먹기 위해 차를 몰고 간 사람도 있었다. 사실 갈비탕이 언제부터 전문적으로 식당에서 판매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없다.
앞서 소개한 조풍연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 시대에 이미 갈비탕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이것을 찾을 수 없으니 아직 연원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갈비구이가 인기를 끈 1960년대부터 갈비탕은 혼례식 피로연에서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고깃국이었다.
푹 곤 갈비에서 우러나오는 국물 맛과 함께 거기에 붙어 있는 고기 살을 입으로 뜯는 맛은 천성적으로 쇠고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갈비탕 한 그릇이면 밥을 몇 그릇이라도 비울 수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면서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진 결과, 한국인의 갈비 욕구는 일순간에 해결되는 듯했다. 특히 도시의 중심가가 확대되고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도시의 외곽지역에 ‘가든’이니 ‘공원’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갈비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조선시대 권세가들이 ‘야연(野宴)’을 즐기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였다. 지금도 번창하는 서울 강남의 삼원 가든을 필두로 하여 늘봄공원이 그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이들 갈비 집은 풍성했던 갈비를 왜소하게 만든 주범들이다.
1960년대 수원갈비의 경우, 도끼로 토막을 내서 그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했다. 당연히 갈비의 포를 뜰 때도 양쪽을 모두 이용하여 양 갈비에 양념이 되어 제공되었다. 그러나 서울 강남에 갈비집이 생기면서 한쪽으로 포를 뜨는 외갈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외갈비는 양갈비에 비해 크기도 작고 양도 적다. 쇠갈비는 한 마리에서 두 짝이 나온다. 그런데 강남의 대형 갈비집에서는 하루에 보통 100짝의 갈비를 소비했다고 하니, 영업이 얼마나 잘 되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창때 늘봄공원의 경우 갈비 작업만 하는 조리사가 2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수원갈비를 비롯하여 서울의 마포갈비, 부산의 해운대갈비, 경기도 포천의 이동갈비, 그리고 전라도 담양과 해남 일대의 떡갈비가 이름난 갈비 전문점들의 명칭이다.
서울의 마포갈비는 일반적으로 ‘○대포갈비’라고도 부른다. 원래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재료로 한 갈비가 주 메뉴였다. 지금은 마포대교가 들어선 곳에 마포나루가 인기를 누릴 때 인부들이 구워 먹던 갈비가 상업적으로 집단촌을 형성하여 소문이 났다.
이에 비해 해운대갈비는 석쇠에 굽지 않고 쇠로 만든 불고기판에 양념을 한 갈비를 쌓아놓고 구워 먹는다. 국물이 냄비에 남기 때문에 여기에 밥을 비벼 먹으면 일품이다. 아마도 1960년대 갈비집의 명성을 처음으로 전국에 날리게 한 것은 이 해운대갈비 덕택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동갈비집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1987년을 전후해서다. 그 이전부터 이동에 갈비집이 하나 둘씩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80년대 중반 나라 경제가 급속하게 좋아지면서 갈비 수요가 늘어났고, 여기에 편승해서 이동갈비의 맛이 소문을 탔다.
산행을 하기 좋은 아름다운 산들이 주변에 많기도 하지만, 군부대도 즐비하여 외지에서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초 이동갈비는 수원갈비에 비해 질보다 양을 우선에 두고 있었다. 더욱이 전국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는 평균적인 맛이 가장 안전했다.
이것이 이동갈비를 유명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광주시에 들어간 송정리에서 만난 갈비에 대한 추억을 조풍연은 다음과 적었다. “송정리에는 술집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가리구이를 시키면, 우선 풍로가 들어오고 자배기로 하나 가득 갈비 잰 것이 들어온다.
조그맣지만 한 대에 5전이었으니까 무척 쌌었다. 주객들 옆에서 작부가 가리를 연방 구워서 상에 올려놓는다. 다 먹은 뒤에 셈을 치르자 하면 남은 가리의 대수를 세어서 돈을 청구한다.”
그런데 이 갈비는 수원갈비나 이동갈비와 달리 떡갈비였을 것 같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도 송정리 일대에는 떡갈비집이 많았다. 지금은 해남과 담양에 있는 식당이 더 소문이 났지만, 당시만 해도 송정리가 으뜸이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외국 귀빈들이 삼호가든에서 갈비 맛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은 강남의 갈비집에서 위세를 부리고 싶어했다. 갈비 맛도 갈비 맛이겠지만, 갈비집을 갔다 와서 풍기는 냄새가 사람들에게 부러움으로 다가왔던 시절이 그때였다.
쇠갈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위로 갈비뼈 사이의 살코기를 말한다. 육즙과 골즙이 어우러져 농후한 맛을 내며 마블링이 좋다. 육질이 부드럽고 적당하게 지방이 있어야 맛이 좋은데, 찜, 탕, 구이 요리에 주로 쓰인다.
마구리는 갈비 살을 얻기 위해 제거되는 척추와 가슴 부위의 살로, 살코기가 별로 없고 뼈가 많아 육수나 갈비탕용으로 쓰인다. 단백질의 소화율은 너무 과도하게 가열하면 오히려 저하되므로 구이 류를 조리할 때에는 재빨리 슬쩍 굽는 것이 좋다.
양념에 재웠다가 직접 불기를 닿게 해서 굽는 한국의 불고기와 갈비구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맛이다. 쇠갈비구이는 눈오는 밤 화로에 석쇠를 얹어 쇠고기를 구운 후 찬물에 담가 지방을 뺀 후 다시 구워 먹는다는 뜻으로 설야멱적, 설야적이라고도 했다.
쇠갈비 구이에는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는데 특히 쇠갈비 살 부분은 지방과 살코기가 골고루 섞여 있어 맛이 일품이다.
내로라하는 소갈비구이집은 거의 왕릉 근처의 지명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소를 중시해서 국가에서 소를 관리했다. 함부로 소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백성들이 평소에 쇠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왕릉 근처는 달랐다. 왕릉에서 제례를 지낼 때면 의례 소를 잡았다. 왕릉 근처에 갈비요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민들이 먹기에는 너무나 고급스럽고 귀한 음식이었기에 문학작품 속에서도 너비아니를 놓고 심리전을 벌이는 장면이 더러 등장한다.
아주 특별한 날에만 쌈짓돈을 풀어 갈비 외식을 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고 갈비집에서는 살집 좋고 고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쑤시개를 꽂은 채 만족스럽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갈비집 문을 나서곤 했다.
갈비를 뜯느라 이 사이에 낀 고기부스러기를 꺼내는 것도 일종의 부의 표현이었다. 남들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버젓이 이쑤시개를 사용하는 광경은 어쨌거나 나는 고기를 먹었다는 일종의 과시였다.
결코 보기 좋은 것은 아닌 이 행위는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이빨 사이에 낄 정도로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 그것도 갈비를 뜯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라 하겠다. 지금도 이쑤시개를 버젓이 물고 있는 동료가 있으면 이렇게 묻곤 한다. “뭐야, 갈비라도 뜯은 거야?”
이처럼 외국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소의 부위가 바로 갈비인데 이토록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척도이자 소고기의 온갖 부위의 맛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가정에서 갈비 요리를 할 때에는 주로 찜을 한다.
찜은 몇 대의 갈비와 무와 감자, 당근, 밤 등의 부재료를 푸짐하게 넣어 만들기 때문에 온갖 재료에 그 황홀한 갈비 맛이 배어 가족 모두의 입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귀한 갈비를 찜으로 만들지 않고 오로지 갈비만을 구워 뜯어 먹는다는 것이 어떤 만족감을 주는 것인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갈비는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뜯는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갈비를 뜯은’ 날은‘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갈비를 뜯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 최고의 칭찬^^ "제가 먹은 갈비 중에서 최상급입니다"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24회 20191108
No. | 제목 | 보기 |
1 | 곱창구이 | |
2 | 닭갈비 | |
3 | 더덕구이 | |
4 | 돼지갈비 | |
5 | 떡갈비 | |
6 | 뚝배기불고기 | |
7 | 로스편채 | |
8 | 불고기 | |
9 | 삼겹살 | |
10 | 생선구이 | |
11 | 쇠갈비 | - |
12 | 오리구이 | |
13 | 황태구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