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벼가 주곡으로 자리 잡은 6세기 이후 벼의 재배 면적은 계속 늘어났다. 그에 따라 논도 계속 증가하였으며, 경작지에서 차지하는 논의 비율도 점차 커졌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고려 시대까지는 논과 밭의 비율을 알 수 있는 통계가 없다. 그러나 고려 시대 전 세징수와 녹봉 지급이 주로 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벼가 가장 중요한 곡물이었고 이에 따라 벼의 재배 면적은 양광도(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와 전라도·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계속 늘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조선 건국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그것은 현재 남아 있는 통계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표 ‘조선 시대 논의 비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15세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 각 군현의 전결수(田結數)를 통계 처리한 결과에 의하면 당시 논의 비율은 약 27.9%였는데,7)
1784년에는 전국에서 경작하고 있는 토지(時起田)의 약 44.6%로 늘어났다. 논의 증가 추세는 경기도와 하삼도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물이 풍부하지 않은 곳에서는 밭에도 벼를 심는다. 따라서 논의 비율만 가지고 벼의 재배 비율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15 세기에 약 42%에 달했던 하삼도 지역 논의 비율은 18세기 말에는 57.2%로, 경기도는 37.9%에서 44.8%로 높아졌으며, 같은 기간 동안 전라도의 논 비율은 46.3%에서 67.2%로 급격히 높아졌다.
이렇듯 전국적으로 논이 점차 확대되었지만 지역 차는 매우 커서 산이 많은 함경도·평안도·강원도· 황해도 지역의 논 비율은 현저히 떨어진다.
✽ 논/논+밭
✽ 이호철, 『조선 전기 농업 경제사』, 한길사, 1986 ; 염정섭, 『조선 시대 농업 발달 연구』, 태학사, 2002 참고.
✽ 15세기 통계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군현 결수를 합산한 것이고(이호철), 1784년 통계는 원장부 결총이 아니라 시기전(時起田) 결총이며, 경기는 강화부와 개성부를 합한 통계임(염정섭).
1784년(정조 8)의 통계만 보더라도 논 비율은 함경도 8.1%, 평안도 13.9%, 황해도 20.3%, 원춘도(지금의 강원도) 30.3%에 불과하였다.8) 따라서 삼남 지방에서는 웬만하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겠지만 북부 산간 지역에서는 쌀밥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한 것은 조선 후기 주곡이 지역에 따라 달랐음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