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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3. 빼놓을 수 없는 보조 음식,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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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채소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예나 지금이나 채소와 나물은 빼놓을 수 없는 보조 음식 재료이자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음식이다. 먼 옛날 농경 생활을 하기 이전 사람들은 산과 들에서 야생 식물의 잎, 뿌리, 열매들을 채집하여 먹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맛있고 잘 자라는 식물을 골라서 집 가까이서 가꾸어 먹었으니, 이것이 채소 재배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은 고구려 건국 직후 비류수에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나라 고대 문헌에는 채소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채소의 특성상 고고학적 자료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고대에 채소를 재배한 실상을 알려 주는 자료는 아주 적은데, 구체적인 것으로 조선 후기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소개된 고구려의 상추와 신라의 가지가 있다.9)

『해동역사』에서는 『천록지여(天祿識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상추를 소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고려(고구려)의 사신이 수나라에 왔을 때 중국 사람들이 아주 비싼 값으로 상추 종자를 구입하였기 때문에 상추를 천금 채(千金菜)라 불렀다고 한다.10)

또 『해동역사』에서는 『본초연의(本草衍義)』와 『유양잡저(酉陽雜俎)』 를 인용하여 신라의 가지 품종을 소개하고 있는데, 신라에서 생산되는 가지는 흐린 자주색의 달걀 모양으로 꼭지가 길고 맛이 달아서 그 종자가 당시 중국에 퍼졌다고 한다.

이 밖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단군 신화에 보이는 쑥과 마늘, 신라 박혁거세 설화의 박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중국 북위(北魏)의 가사협(賈思勰)이 6세기에 펴낸 농서인 『제민요술 (齊民要術)』에 재배법이 소개되어 있는 오이, 참외, 가지, 박, 아욱, 우엉, 파, 마늘, 무청, 부추, 생강 등은 한반도 주변에서도 재배되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채소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고려사』와 고려 말 문집에서 여러 가지의 채소 이름을 찾을 수 있어서 이전 시기보다 나은 편이다.

특히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 『동국 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참외, 순채, 토란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 고려 후기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향약구급방』에서도 연근, 도라지, 토란, 아욱, 상치, 무, 배추, 우엉 같은 채소를 찾을 수 있으며, 국가의 큰 제사(吉禮大祀)인 환구(圜丘) 친사의(親祀儀) 때의 제사상에는 미나리, 죽순, 무청(菁) 등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강소(薑所)가 있었던 것에서 생강을 전문적으로 재배하여 국가의 수요에 충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한편 『고려사』에 따르면 1064년(문종 18)에 흉년이 들자 개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임진강 나루 근처의 보통원(普通院)에 임시 급식소인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고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죽과 채소를 준비하여 여행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채소가 중요한 음식이었을 뿐 아니라 여름철에 비교적 쉽게 재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려 시대의 채소는 주로 음식으로 이용되었지만, 이 밖에도 선물, 약재, 제수 등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였다. 특히 주로 강소에서 생산되던 생강은 매우 귀한 존재였다.

1018년(현종 9)에는 전사한 장졸의 부모와 처자에게 생강을 내려준 일도 있었으며, 『고려사』에는 생강을 강탈하려고 폭력을 휘둘렀던 박보광(朴葆光)의 이야기가 전한다.

박보광은 명종 때 관리 박제검(朴齊儉)의 아들이었는데, 길에서 이소응(李紹膺)의 처가 데리고 있던 비복의 생강을 빼앗으려고 폭력을 휘둘렀다가 이소응의 노복들이 무기를 들고 집으로 몰려들자 오히려 도망하여 숨고 말았다.

당시 생강이 얼마나 귀한 채소였는지 알 수 있는 웃지 못할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에 재배되었던 채소의 종류는 여러 농서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요 농서에 기록된 채소를 정리하면 표 ‘채소의 종류’와 같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조선 시대 채소의 종류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제민요술』에 실린 주요 채소인 오이, 가지, 박, 마늘, 생강, 부추, 염교, 겨자, 파, 토란, 아욱, 순무, 미나리, 유채, 목숙 등은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채소로 계속 재배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채소들이 지금도 중요한 채소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허균(許筠, 1569∼1618)의 저작인 『한정록(閑情錄)』과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호박, 참외, 상추, 수박, 배추, 무 등이 새로 보이며, 이것은 조선 후기의 『산림경제』 로 이어진다.

셋째 『임원경제지』에는 고추가 보이는데, 이것은 이후 고추가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들과 산의 나물은 채소 재배 이후에도 중요한 먹을 거리였다. 특히 흉년의 풀뿌리와 나무껍질은 빈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 었다.

『임원경제지』 「관휴지(灌畦志)」에는 재배하는 채소 외에 특별 부록으로 냉이, 고사리, 명아주, 곰취 등 29개의 산과 들에 있는 푸성귀(山野蔌 品)를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먹는 나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여기서 그 종류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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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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