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요리제법』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 편집 배열 방식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표 6> 『조선요리제법』의 편집 배열 방식
『조선요리제법』은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달리 판본마다 반드시 서문이 포함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서문은 본문이 시작되기 이전에 편성된 경우가 보통이며, ‘서(序)’ 혹은 ‘서문(序文)’라고 쓰여져 있다.
이 서문은 저자가 쓰거나, 저자의 이력과 관련된 인물이 맡게 되거나, 혹은 당대 유명인이 써주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인이 작성한 서문은 책의 내용을 보장하였으며, 책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조선요리제법』에는 1) 저자의 서문, 2) 유명인의 서문, 3) 저자와 관련 있는 인물의 서문이 모두 등장한다.
특히 저자가 작성한 서문은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조선요리제법』의 서문을 보는 것은 작가의 의중을 읽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요리제법』 초판과 재판에는 저자인 방신영의 서문은 없고,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자인 위관 이용기(偉觀 李用基, 1875~1933?)의 서문이 게재되어 있다. 이용기가 작성한 서문 첫 번째 문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음식이란 것은 문견과 솜씨를 몹시 찾는 것이니 마찬가지 훌륭한 감을 가지고도 맛과 꼴을 만들지 못하고 조(調)와 격(格)을 이루지 못하여 음식 모양이 사나운 때에 집안 모양에 따라 사나운 사실은 흔히 있는 일이라. 건더기와 국과 소금과 기름을 뒤섞기만 한 것이 어찌 음식이리오.
진실로 솜씨 곧 없으면 좋은 감과 많은 거리로써 암만 애를 쓰고 정성을 드려도 맛있는 음식을 남의 입에 넣어줄 수 없는 것이니 마치 아무리 연장이 갖춰 있고 재목이 많이 쓰였을지라도 무재인(無才人)의 손에서 덩그런 집채가 저절로 지어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그러나 찌와 이력과 솜씨만 있으면 변변치 아니한 감과 못한 가지로도 넉넉히 입맛을 다시게 하는 것이니 음식의 솜씨는 진실로 변변치 못한 것을 달게 먹게 하는데 밝히 드러나는 것이로다
이용기는 첫 번째 문단에서 음식을 만드는 데 솜씨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좋은 재료와 음식에 대한 감을 가지고 있고, 정성을 들인다 해도 솜씨가 부족하다면 음식이 맛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입에 넣어줄 수 없는 것이니”라는 말에서 가정의 구성원들을 먹이거나 혹은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이는 다음 문단에서 더 강조된다.
그러나 누구는 솜씨 있게 하야 맛나게 먹이려는 생각이 없으리오마는 없는 솜씨를 억지로 내지 못함에 부끄럽고 민망하고 스스로 무재주한 것을 광고하는 줄 알면서도 맛없는 음식을 남의 앞에 내어놓는 것이오. 누구는 솜씨 있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리 오마는 불행히 문견이 이르지 못하고 지식이 자라지 못함에 스스로 수치를 무릅쓰지 아니치 못한 것이라.
세상에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함으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함으로 부끄럼 당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처럼 좋은 감을 가지고도 맛있게 먹지 못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매양 이일을 생각할 때에 딱하게 여김을 마지 못하야 어찌하여야 옳을고 하였더니, 이제 방신영 여사의 이 저술을 얻어 보니 갖은 음식 만드는 법을 가장 알기 쉽게 편집하여 아무리 궁벽한 곳에서와 무무한 집에서와 무재주한 사람이라도 이 책 한권만 가지면 일등솜씨를 저절로 얻고 일등음식을 임의로 만들어 소처라도 고량보담 맛나게 하고 같은 고량이라도 갑절 맛나게 할 수 있는 지라.
슬프다, 이 책 가는 곳에는 음식 솜씨 없는 지방과 가정과 부인이 다시 어디 있으리오. 방 여사의 세상과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공이 과연 크다 할지로다. 오래 이런 책이 있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차에 이 좋은 저술을 보고 기꺼운 듯을 표하기 위해 두어마디를 책머리에 쓰노라
정사(丁巳)년 백중날(1917년 음력 7월 15일), 위관 이용기(偉觀 李용基 書)107)
(필자가 현대어로 번역함)
남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맛있게 하기 위해서는 솜씨를 길러야 하며, 이 솜씨를 기르기 위해서는 견문과 지식을 넓혀야 한다고 두 번째 문단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용기는 솜씨가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앞서 광고 문구에서도 나타났던 “무무한 집”과 “무재주한 사람”들이다.108)
방신영의 저술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알기 쉽게 “편집”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솜씨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을 기뻐하여 서문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요리제법』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자인 방신영과 이용기가 서로 교류하던 사이임을 증명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요리제법』 서문에도 마찬가지로 이용기의 서문이 등장한다. 이 서문은 1917~1918년판 서문 내용이 그대로 중복되며, 광익서관으로 판권이 옮겨간 이후에 이용기는 본인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예시를 추가하였다.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어니와 어느 집 사랑에서 떡국을 쑤어 내오라 하였더니 떡을 온 가래로 쑤어 내오니 남의 집 부인의 일이매 객들을 웃음을 들어 막고 ‘떡이 기니 한참 베어 물어먹기 좋다’하고 먹거니와 그 주인이야 무슨 모양이리오. 억지로 객 가기를 기다려 안에 들어가 아내의 지각 없음과 사랑의 모양 흉함을 야단치리 아무리 금슬이 좋고 어진 남편이기로 가만히 있지 못할 일 아닌가.
그 후에 또 객을 청하여 점심을 차리는데, 국수장국을 하여 내오라 하였더니 국수를 싹독싹독 썰어 장국이라고 내보내니 이 모양이 어떠한가. 객들이 다른 말은 못하나 그 중에도 짓궂은 자는 젓가락을 들여가고 숟가락을 내오라 하니 떡국에 마땅치 못해하던 남편이 이번에는 체면도 아무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곧 안으로 들어가서 방망이라 홍두깨라 보이는 대로 내던지며 야단을 치니 정신없는 그 부인이 훌쩍훌쩍 울면서 폭백하는 말이 ‘요전에는 떡국을 길이대로 쑨다고 꾸지람을 하기에 이제는 떡보다 더 긴 것을 그냥 하였다가 큰 봉변을 할까봐 짤막짤막하게 하였는데 무슨 야단을 이렇게 하시오’ 하더라니 이런 일은 좀 심한 말이어니와…109)
(필자가 현대어로 번역함)
추가된 내용에는 떡국이나 국수를 어떻게 요리할 줄 모르는 부인이 등장하고, 이 부인이 남편의 손님을 대접하여 망신을 당한다는 예시가 포함되었다. 요리 솜씨가 서투른 부인의 일화를 통해 『조선요리제법』을 읽을 법한 독자층이 부인들이며, 부인들에게 이 책을 선전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용기의 서문 바로 다음에는 저자인 방신영이 작성한 서문이 나오며, 이 서문은 저자가 생각하는 본인의 요리책 저술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류생활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음식이니 음식은 곧 우리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자 어찌 식물(⾷物)을 선택지 아니하며 음식 만드는 법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으리요. 그럼으로 과학이 발달되고 위생 사상이 보급된 각국에서는 식물에 대한 연구와 음식 만드는 법에 대한 노력이 적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런 데 독히 우리 조선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는 더욱이 캄캄하고 등한시 여길 뿐 아니라 촌가정을 들여다보면 가치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볼품없이 맛없이 만들어 먹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말도 할 수 없으며 깨끗지 못하게 하는 가정도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방신영은 이용기와 다르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주가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음식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과학이 발달되고 위생 사상이 보급된 각국”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에도 이런 식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촌가정”에서 맛없게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태와 깨끗하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한다. 위생을 중요시 여기는 풍조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방신영은 이런 문제점에서 출발하여 또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가 이러한 것을 볼 때에는 우리 조선에 가정의 교육까지 제일치 못한 것을 크게 애석히 여기는 동시에 이러한 일에 대하여 도움이 될만한 책도 한 가지 없음을 크게 유감으로 여겼습니다. 고로 천견을 불고하고 수년 전에 한 책을 편술하여 그 이름을 『조선요리제법』이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시 경험이 없는 가운데서 된 일이라 미흡한 점이 많았는 중 특별히 부록 중에 『「술 만드는 법』 같은 것은 본시 제의 기입한 것이 아니었음으로 이를 더욱 유감으로 여기던 바, 이번에 그 내용을 대개 교정하고 증보(增補)하여 일신케 해서 제 3판을 출판케 하옵나니 이는 오직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참고 재료가 되기를 원함이며 또한 우리 조선 각 가정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과 편의가 되기를 원함이오니 바라옵건대 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일깨워 주시고 좋은 재료가 있거든 알게 하셔서 후일에 완전한 한 책을 이루어 유용한 서물이 되게 하심을 감히 독자 여러분께 앙탁하나이다.110)
(필자가 현대어로 번역함)
첫 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음식 만드는 법을 가정에 교육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볼수 있으며, 그전까지는 이런 식의 책이 드물었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생각을 견지하여 몇 년 전 『조선요리제법』을 서술하였다고 밝혔는데, 이 책이 초판(1917)과 재판(1918)으로 보인다.
신문관에서 『조선요리제법』을 간행하고 난 뒤 3~4년 후 발행소가 광익서관으로 바뀌고 광익서관에서 1921년판이 발행되지만, 방신영은 이를 또다시 초판이 아니라 ‘증보 3판’으로 지칭하고 있다. 즉, 발행소가 달라졌어도 『조선요리제법』의 판본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초판과 재판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수정하고 증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방신영은 경험이 없던 와중에 책을 구성하면서 ‘술 만드는 법’은 원래 편성하지 않았던 것을 밝히고 있는데, 초판과 재판에서 부록에 속했던 ‘술 만드는 법’은 1921년 이후부터 제외되어 등장하지 않는다.111)
조선도서주식회사로 판권이 넘어간 1924년 4판의 『조선요리제법』에는 구암동인(龜岩洞人)과 저자에 의해 작성된 서문이 등장한다. 구암동인은 이름이나 이력 등을 밝히지 않고, 단지 자신을 구암동인으로 칭하고 있다.
또한 구암동인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거의 순한글에 가깝게 서술하였다. 이 서문은 계해(癸亥)년 맹동(孟冬)에 적힌 것으로, 계해년은 1923년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요리 만드는 법』에 대하여
사람에게는 동물적 생활과 비동물적 생활의 두 가지 방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동물적 생활을 나누어 보면 대개 재욕과 정욕과 식욕의 이 세 가지가 그대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식욕이라는 것은 강보에 떨어질 때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일생을 통하여 조금도 쇠퇴되지 않고, 사람의 욕심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외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비동물적 생활에 가깝게 만드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가령 식욕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으며 혹은 그 아름다운 취미와 쾌락을 깨트린다 하면, 이는 곧 동물적 생활에 예가 됨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원래 음식이란 사람의 생활에 두 가지 사명이 있는 것이외다. 즉 한 가지는, 실제로 자양품을 섭취하여 육체의 영양을 도움으로 말미암아, 정력을 길러 왕성한 활동력을 만족케 하여 아름다운 취미를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다시 말하면 미각과 후각과 시각을 상쾌하게 하고 청신케 하여 인생 생활의 한 가지 향락을 더하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외다.
이를 통틀어 말하면, 한 가정에 있어서는 사람의 영양을 도와 하루의 근로로 말미암아 피로한 육체와 심신을 회복케 하는 동시에, 가정의 단란을 도탑게 하고 사교상으로는 이로 말미암아 화창과 돈목을 더하게 합니다.
구암동인은 조선요리제법을 풀이하여 “조선 요리 만드는 법”으로 칭했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였다. 저자는 “동물적 생활”과 “비동물적 생활” 가운데서 동물적 생활에 해당하는 식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인간적 삶에 해당하는 “비동물적 생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 중에서 음식은 인간의 생활에서 1) 육체의 영양을 돕고 2)가정의 단란과 사회관계의 돈독함을 돕는 사명이 있다고 본다. 즉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하면 한 나라의 요리라든지 그 요리법이라는 것은 그 나라의 풍토와 관습과 민족성이라는 깊은 근저로부터 자연히 발달된 것이지만, 그 요리를 잘 만들고 못 만드는데 따라서 한 국민의 영양과 취미에 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요리법이 발달되지 못하여 좋은 재료로도 십분의 영양을 얻을 것을 오 분밖에 얻지 못한다면, 그 국민의 체질이 허약하게 되리라는 것은 물론이며, 또 같은 재료로도 솜씨가 좋지 못하여 그 맛과 빛과 보임이 그릇될 지경이면, 한 집안의 쾌락을 깨트리리니, 국민의 풍화상에 미치는 손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욱이 한 집안의 주부로써, 백반 요리에 밝게 통치 못함은 일가의 부끄러움을 남에게 보이는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과 같이 학교교육을 받기에 골몰 하여 가정에 어두워서 도마를 안고 앉으면 손끝을 찍고 상을 차리면 쥐코밥상밖에 만들 줄 모르는 학교출신의 새아씨들은 더욱이 이에 대하여 많은 힘을 쓰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외다.
이제 방여사 신영 선생이 이에 생각함이 있어, 오랫동안 연구하여, 일편으로 미래의 주부를 위하여 교편을 드는 여가에, 가정의 모든 주부의 서투름을 바로잡고 애씀을 덜고자함에 당하여 기쁜 마음으로 두어마디 어리석은 생각을 붙이고자 하거니와, 그 내용의 정세하고 곡진함은 반드시 여러분의 만족을 드리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112)
(필자가 현대어로 번역함)
구암동인은 음식이 여러 해를 거쳐 오랫동안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토, 관습, 민족성이 반영된다는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또한 국민의 영양을 보충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간주하여 ‘국민과 국가’ 관념이 음식에 반영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집안의 쾌락을 깨트리는 것”이 곧 국민의 교화에도 손실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개인의 영양이 국민으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 집안의 주부가 음식에 능통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허물이 된다는 점은 이전에 이용기가 서문에 적었던 내용과 흡사하다.
구암동인도 부인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고 있으며, 부인 외에도 학교를 다니는 새아씨를 언급하였다. 그 당시 여학교를 다니던 여학생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이 학교교육을 받으며 요리에 능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이에 서투른 주부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 『조선요리제법』을 칭찬하는 것으로 서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방신영도 구암동인의 서문 뒤에 본인의 서문을 편성하였는데, 이는 1921년판 광익서관 발행 『조선요리제법』의 저자 서문과 내용이 동일하다.
1924년판 『조선요리제법』은 내용이 이전과 거의 흡사하며 편집상의 차이 정도만이 나타나는데 이 때 서문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방신영이 동경 유학에서 근대 영양학을 접하고 돌아온 이후로, 『조선요리제법』도 일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서문도 그에 따라 새롭게 편성되었다. 1931년 5부의 서문은 총 3부로, 마제시-정인보(鄭寅普, 1893~1950)-저자 방신영의 순서로 작성되었다. 마제시는 미국인 여선교사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한 이름이나 생몰년도는 신문이나 관련 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다.113)
앞서 광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1931년판부터는 한글학자 이윤재가 『조선요리제법』을 읽기 쉬운 한글로 교정했기 때문에 모든 문장이 현대어에 가깝게 쓰였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이라고 정의를 했다. 이 요리술의 기원은 언제 어디서 시작한 것이라 밝히 말하기 어려우나, 그러나 이 요리술이 임의 수년간을 실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산양하여 얻은 조수의 고기로부터 높은 산과 무성한 삼림에서 채득한 초록의 뿌리들이며 농부들의 신고로 산출한 오곡들은 다 요리술에 의뢰하여 그 원미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이에 많은 향취를 증가하고 또 소화를 조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리술은 여러 시대의 경험을 통하여 현대에는 고대인이 상상치도 못하리만치 발달되어 있다. 요리의 원료는 물과 흙과 공기들이 공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금일에 이르러서는 상고들이 세계 각처로부터 향료와 수다한 새 재료를 수집하여 식료의 내용을 부유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를 이용한다던가, 혹은 파괴하는 것은 전혀 요리술에 말미암는 것이다. 고로 인류가 문명할수록 요리의 기술을 더욱 높이 상찬하게 된다. 모든 군왕과 귀인들이 그들의 식욕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이 요리술을 궁구하며 빈한한 가정에서 조악한 원료로 선량한 식물을 요리할 만한 주부를 구하는 것이 금일의 현상이다.
마제시의 서문은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이라고 정의를 했다’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요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요리라는 행위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마제시는 이 요리라는 행위를 ‘요리술’이라는 기술로 해석한다.
즉, 수년간 쌓여온 경험과 행위가 기술이 되었으며, 문명이 고도화된 인류일수록 이 기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마제시는 1) 군왕과 귀인이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술의 발달과 2) 가난한 가정에서 변변치 않은 재료로 요리를 하는 주부 이 두 가지가 현실에서 요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식재료가 풍부하며 높은 기술력을 가진 미식을 위한 요리와 가정에서 일상을 꾸리기 위한 요리가 병행하고 있는 그 당시를 반영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음은 위를 통하여 얻는다』고 담대히 말한 자가 있다. 나는 이 말의 진위를 표명코저 아니하나, 그러나 현대 모든 기술 중에 요리술이 우리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현대 문명한 남녀와 아동들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 우리의 가정은 부엌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로 고대 가정을 난로가에 있는 신으로 상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엌으로부터 도는 음식의 향미는 그 가정에 사는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유쾌하게 하지 아니하는가. 그러나 불량한 요리술은 가정의 파괴를 부르며 농부와 상고들의 많은 노력을 헛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요리술은 우리의 가정과 및 인류사회에 깊은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현대를 크게 행복 되게 만들려는 모든 사람에게 과거 기 천년간 모녀 상전한 요리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여, 모든 농부와 상고들의 노력을 가장 유력하게 만들며 따라서 무수한 우리가정에 다대한 기쁨을 공헌할 줄 믿는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이 저서가 현대와 및 먼 장래까지 위대한 세력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봉사하여 줄줄 자신한다.
昭和六年三七(1931년 3월 27일)
마제시
마제시의 서문은 방신영이 1921년에 작성한 서문과 의견이 비슷하다. 즉 원만한 가정생활을 위하여 요리를 배워야 할 것을 권장했던 이용기나 구암동인의 저술과는 다르게, 요리 기술은 그 자체가 삶에서 중요한 것이며, 인류의 문명과도 연관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요리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고 요리책을 저술하는 것이 가정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업적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다. 또한 음식은 수천년의 역사를 담은 것이기 때문에 책으로 작성된 요리법이 미래에도 영향력을 미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학자이자 교육자인 정인보는 마제시와 마찬가지로 1931년 3월에 서문을 작성하였다. 정인보는 자신과 『조선요리제법』의 인연이 있음을 통해 서문을 작성하고 있다.
벌써 여러 해 전이다. 견지동 조선도서회사(堅志洞 朝鮮圖書會社) 윗층에서 홍벽초(洪碧初)에게 졸작(拙作)의 이병(利病)을묻다가 벽초(碧初)의 청으로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이라는 책 제목을 쓴 일이 있었다. 책 내용이 어떤 것도 모르고 누가 지은 책인지도 몰랐었다.
그 뒤 얼마를 지나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專⾨學校)에서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이라는 책을보고 제목 글씨가 내 수적(⼿跡)임을 알았다. 별안간 조선도서(朝鮮圖書) 윗층 생각이 났다. 그리고 홍벽초(洪碧初)의얼굴이 새삼스럽게 그리웠다. 회사집은 벌써 주인이 바뀐지 오래다. 벽초(碧初)의얼굴을 조격(阻隔)한지 해로 벌써 삼년이나 된다. 그런데 생각도 아니한 이 책은 인연 있는듯이 구흔(舊痕)을보인다. 인사(⼈事)란 과연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것인가?
그러다 저자(著者)이신 방신영 여사(⽅信榮⼥史)를뵈옵게되고 책 내용도 대강 번열(翻閱)하여 보았다. 조선 음식(朝鮮飮⾷)이 양식(洋⾷)이나 화식(和⾷)이나 청요리(淸料理)보다 낫다는 것은 아니나 조선인(朝鮮⼈)으로 이같이 조제(調製)하여내려온것을 생각하여보면 이 곳 조선인 식성(朝鮮⼈⾷性)인 영상(映像)된 것이라, 양식(洋⾷)에서 이를 구할수 없고 화식(和⾷)에서 이를 구할수 없고 청요리(淸料理)에서 이를 구할 수 없다.
그런즉 낫고 못하고 조선인으로서는 이렇게 하여야 그 자연(⾃然)한 기호(嗜好)에 적의(適宜)할것이아닌가. 내 어려서 선비(先妣)보시는 『유한당기留閑堂記』란책을 보았다. 지금 어렴풋하나 음식 조제(飮⾷調製)하는데 관한 금기(禁忌)의 몇 가지가 적혔던 것은 기억(記憶)에 남았다. 이 책도 요리제법(料理製法)과 유사(類似)한 것인 듯하다. 방신영 씨(⽅信榮⽒)의 저서(著書)를읽을 때 또다시 어렸을 적 옛날 일(幼少時舊事)을 생각하였다.
제목(題⽬)으로부터 나는 돌아온 추억(回憶)이 내용(內容)을 보고 나서 생기는 옛 기억(舊成)이 다 나 혼자나 느끼고 생각할 것이라 굳이 거듭 말할 것이 없거니와 조선인(朝鮮⼈)의 식성(⾷性)을 조선 음식(朝鮮飮⾷)이라야 옳게 맞출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누구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어떠한 깊은 회고(回顧)와 사무치는 느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그동안 여러 판(版)이 되었다. 이 오로지 지으신 이의 고심 노력(苦⼼努⼒)하신 수확(收穫)이라 할것이나 조선인(朝鮮⼈)의 음식(飮⾷)에서도 자성(⾃性)을 찾으려는 그 추향(趨向: 마음에 쏠리어 따라감)을 얼마쯤 들여다 볼 수있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한성도서회사(漢城圖書會社)에서 인간(印刊: 인쇄출간)하여 나오는 이 판(版)은 수정증보(修正增補)한 것이니 내용(內容)이 더욱 충실(充實)하여 전 것과도 비할수 없는 거편(巨篇)이라 나가는 대로 풍행(⾵⾏)할 것은 물론이다. 두어 줄로서 서문(序⽂)을 대하여 이나마 홍벽초(洪碧初)에게 곧 묻지 못함을 한(恨)한다.
이번에 다시 한성도서회사(漢城圖書會社)에서 인간(印刊: 인쇄출간)하여 나오는 이 판(版)은 수정증보(修正增補)한 것이니 내용(內容)이 더욱 충실(充實)하여 전 것과도 비할수 없는 거편(巨篇)이라 나가는 대로 풍행(⾵⾏)할 것은 물론이다. 두어 줄로서 서문(序⽂)을 대하여 이나마 홍벽초(洪碧初)에게 곧 묻지 못함을 한(恨)한다.
신미년 삼월(辛未三月, 1931년 3월) 정인보(鄭寅普)
정인보의 서문의 문체는 앞서 마제시의 서문과 다르게 한문을 중점적으로 쓴 국한문 혼용체이다. 정인보는 홍벽초와의 인연을 통해 『조선요리제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홍벽초는 홍명희(洪命憙, 1888-1968)로, 임꺽정을 쓴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홍명희는 1922~1924년경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신소설을 출판하였으며,114) 이 당시 조선도서주식회사에 출입하면서 정인보와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서문에서는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했던『조선요리제법』의 책 제목을 정인보가 썼다는 것이 확인된다.
다만 1924년 판본으로 추정되는 『조선요리제법』의 겉장이 소실되어 정인보의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정인보는 조선인에게 맞는 것이 조선요리임으로 이『조선요리제법』이라는 책이 충분히 의의를 가진다는 점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도 『유한당기(留閑堂記)』라는 이름의 책을 읽었다고 하며, 이 책이 요리책과 비슷한 형태였다는 식으로 회고하고 있다. 『유한당기』라는 책은 한자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한당사씨언해록(幽閒堂謝氏言行錄)』이라는 책으로 추정된다.
『유한당사씨언행록』은 이본이 총 30종으로, 대부분이 한글로 적힌 필사본이며 정확한 필사 시기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유한당기』로 불리기도 한다.115)
유한당이라는 인물과 집안 가족들의 문답으로 구성된 『유한당사씨언행록』은 문답의 대화과정을 통해 여러 지식에 대한 정보를 서술하고 있으며, 이 중에 음식과 양생법이 포함되어 있다.116)
비록 사실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인보가 언급한 『유한당기』는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지식을 전달하는 『유한당사씨언해록』과 같은 형태이거나 혹은 동일한 서적으로 추측된다.
만일 동일한 서적일 경우 정인보는 『조선요리제법』이라고 하는 요리책을 과거의 『유한당사씨언해록』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고 보고 있으므로 여성독자를 위한 실용지식을 포함한 책으로 『조선요리제법』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주지할 점은 정인보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여성독자는 이 당시 ‘신여성’이라고 지칭되는 여성 독자층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던 성역할에 충실한 여성 독자층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1934년 제 6판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위의 마제시, 정인보의 서문과 함께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의 서문이 추가되었다. 이 판부터는 6판인 『조선요리제법』 1934년판부 터는 1931년판 『조선요리제법』과 동일하게 구성되었다.
서문도 1931년판에 작성된 이후로 고정되어 이후 1939년 증보 9판 『조선요리제법』까지 같은 내용의 서문을 볼 수있다.117)
인류의 생활상 제일 중요한 것은 음식이니 곧 인류의 생명을 유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과학이 발달 되고 위생이 보급된 각국에서는 음식물에 대한 연구와 음식 만드는 법에 대하여 크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책자도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여겨서 천견을 불고하고 책을 저술하여 그 이름을 『조선요리제법』이라 하였습니다.
때는 연소하였고 경험도 없었으나 자연으로 일어난 붉은 마음 하나로써 어머님 무릎 앞에서 한 가지 한 가지를 여쭈어보고 조고만 손으로 적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천부(三千部)를 초판하고 매번 이천부(二千部)씩 다섯 판까지 출판했습니다.
생각하니 불완전한 것이나마 그간 일만(⼀萬)동무의 손에 한권씩 놓여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절판된바 다시 이 책을 찾으시는 분의 부탁이 계속하여 있으므로 다시 수정한 것입니다. 옛 때와 달라서 지금 여자는 부모 앞에 있을 기회가 적은 연고로 자연 책자의 필요와 각고에서 힘써 가르쳐야할 필요를 더욱 깊이 느끼었습니다.
음식을 솜씨 있게 제일 잘 하는 것은 한 가정 식구들의 큰 행복이오, 사회에까지 미치는 그 영향이 큰 연고입니다.『조선요리제법』 제 일판이 출판된 이후 요리책 두어 종류가 생기었으나 본 책 내용과 자자획획이 틀림없이 옮겨놓았고 술, 제조법 등 몇 종류의 더함이 있으나 별다른 필요를 더 얻지 못하게 됨을 유감으로 여기고 이에 실지로 경험해본 결과를 가지고서 다시 교정하고 증보하여 제 육판을 출판하오나 큰 유감은 여가여가에만 쓰노라고 넉넉한 시간도 없었고 또 신학기에 학교에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날짜가 부족하므로 마음에 예정했던 그대로 다 못하였음을 크게 유감으로 여기오나 오직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참고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 조선가정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과 편의가 되어지기를 바라나이다.
끝으로 이번 이 책이 우리의 한글로 나오게 된 것은 이윤재 선생님의 그 귀하신 시간과 힘을 애끼지 아니하시고 고쳐주신 결과입니다. 그 크신 공적을 무한히 감사하오며 따라서 독자 여러분께서도 기쁘게 읽어 주실 줄 믿고 겸하야 감사를 드리나이다.
방신영은 6판부터 위의 내용으로 자신의 서문을 삼고 있다. 앞서 1921년판과 1924년 판과는 다르게 읽기 쉬운 한글로 교정되었다. 이 서문에서는 본인이 직접 말하는 저술 의도가 나타난다.
즉, 조선요리와 관련된 책이 없었기에, 실제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요리법을 하나하나 기록했고 이것이 『조선요리제법』의 초고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또한 1929년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 부임한 방신영은 이 책을 학교에서 교과서로 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가운데 실제 요리법을 실험해보고 요리법의 일부를 수정한 사실도 확인된다. 방신영의 언급에서 실제 『조선요리제법』이 얼마 정도의 부수가 간행되었는지도 밝혀진다.
초판은 3천부, 그 다음 판은 2천부씩이 발행되었다. 이 책들이 모두 절판되어 다시 5판을 찍은 것이었는데 『조선요리제법』의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1934년도 6판 『조선요리제법』의 제일 첫 번째 서문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학감, 부교장, 교장, 초대 총장에 취임했던 김활란이 작성한 것이다.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방신영과는 1920년대 근우회, YWCA의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다.
방 선생이 많은 경험을 기우려 쓰신 요리제법이 판을 거듭하여 나오다가 이제 다시 수정되어 육판으로 나오게 되는 것은 첫째로 그 내용이 충실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책에 몇 글자의 서문이나마 쓰게 된 것은 기꺼운 영광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주저한바 있었으나, 여러 방면에 있어 고락을 같이하는 친구며, 존경하는 선배 이매 사양할 길이 없었다. 다만 머리를 숙여 과거의 노력과 공헌을 치하하며 앞으로 계속될 성공을 기다리는 뜻으로 이 몇 자를 적는 바이다.
다음으로 이 책이 주부 측에 가장 인기라는 말은 우리 가정주부들이 그들의 생활을 점점 조직화하고, 과학과 하여가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각각 그 맡은 일을 능률 있게 하려면 먼저 건강이 필요한 것이요, 건강하려면 음식의 조절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여러 가지 영양소를 비례에 맞게 하며 요리 제법을 이용하여 음식이 맛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육판되는 이 책은 우리 생활에 기초가 되는 실용적 수요에 가장 적절히 응하는 것이다. 누구나 조선 사람 되고는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 할 것이다.
김활란
김활란은 서문에서 요리에 대한 근대적인 영향력을 인지하는 어조를 취한다. 이는 생활개선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대목으로 추정되는데, 건강한 국민을 만드는 데는 영양이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위해서는 가정에서의 요리가 과학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생활에 기초가 되는 실용적 수요”를 잘 담당해줄 수 있는 『조선요리제법』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조선요리제법』에 기술된 서문들을 통해 본 책의 독자층이 가정부인(家庭婦人)과 여학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책의 저술 목적에 대해 서문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의의를 표명했다.
즉 『조선요리제법』은 1) 가정부인(혹은 학교 다니는 새아씨)들의 솜씨를 함양할 수 있으며(이용기·구암동인·방신영) 2) 다른 나라 요리가 아닌 조선사람에게 맞는 조선요리를 정리한 것이며(정인보) 3) 원래 음식이 인간의 생활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며(구암동인·방신영·마제시) 4) 생활을 개선하는데 실용적으로 음식을 이용하기 위해서(김활란) 저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