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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리서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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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4. 서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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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저자

본 장에서는 『조선요리제법』이라는 요리책의 서지 형태와 저자·출판사·광고 등의 출판 구조 및 내용 구성을 면밀히 검토하고자 한다. 1절에서는 서지사항을 토대로 『조선요리제법』의 저자와 출판사의 정보를 서술하고자 한다.

기존의 글에서 출판사는 주로 제외 된 편이었으나, 『조선요리제법』을 출간한 출판사가 여러 번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선요리제법』의 판본을 시대 순으로 살핀 다음, 소재가 확인된 판본을 중심으로 보존 상태 등을 정리할 것이다.

또한 『조선요리제법』 서적 광고를 살펴봄으로써, 그 당시 『조선요리제법』이 출판사와 대중에게 어떤 책으로 인식되었는지를 광고 문구와 함께 분석한다. 2절은 『조선요리제법』의 내용 구성과 관련된 부분으로, 서문과 목차 등의 요소를 살펴볼 것이다.

『조선요리제법』은 1917년 초판부터 저자의 서문과 다른 사람이 헌정한 서문이 확인된다. 따라서 판본에 따라 서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서문을 쓴 저자들의 『조선요리제법』과 요리책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고자 한다. 『조선요리제법』의 목차는 판본에 따라 그 변화양상의 폭이 넓다.

판본을 총 3기로 구분하여 바뀐 목차를 비교하고 요리법의 구성 방식에 대해 서술할 예정이다. 3절에서는 이른 시기에 발행된 『조선요리제법』의 내용을 앞선 책과 비교한다.

또한 앞선 책과의 유사성이 발견되었을 경우, 지식이 어떤 식으로 전승되었는지의 여부를 검증 하도록 한다. 그리고 어떤 요리법들이 주로 전승되었는지, 판본별로 나타나는 차이를 비교하여 『조선요리제법』의 서술 방식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한다.

♣ 방신영(方信榮)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은 『조선요리제법』을 쓴 저자이다. 방신영은 1890년 음력 9월 3일 독실한 기독교였던 아버지 방한권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방희영과 방규영이 있으며 언니 방희영의 첫째 아들인 이석만(李奭萬)은 요리책 『조선요리제법』(1934)의 저자이기도 하다.

방신영은 최광옥(崔光玉, 1877~1910 혹은 1911) 선생에게 감화를 받아 어머니의 유명하신 음식 솜씨를 한 가지씩 종이에 받아 적으며 『조선요리제법』을 작성하였다고 『우리음식 만드는 법』(1952)의 서문에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방방곡곡으로 다니시면서 수천만 군중을 울리면서 곳곳에 학교를 세우시고 또 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신 분이시었으니 이분이 고 최광옥(故 崔光옥)이시었다. 오랜 동안을 감옥생활과 아울러 너무 과로하신 결과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전 하루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신 것이 동기가 되어 그날부터 나는 붓을 들기로 시작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 앞을 떠나지 않고 날마다 정성껏 차근 차근 일러 주시는대로 꾸준히 기록해 놓은 것이 나중에 보니 꽤 많아졌었던 것이다.

한적한 우리 여성 사회에 큰 도움이 되어라 하고 간곡히 일러 주시던 선생의 그 뜻을 받아 기어이 책을 내기로 하였으니 그 때 내 나이도 어렸고 또는 처음 일이라 미숙품이었으나 『조선요리제법』이라고 이름해서 첫 번 열매를 내어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54)

최광옥 선생은 방신영의 제자인 최이순(崔以順, 1910~1987)의 부친으로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제자의 집에 들러 최씨 어머니에게 자주 식사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제자는 방신영의 형제인 방규영으로 추측되며, 방신영과 이를 계기로 만나게 되었다.

최광옥은 방신영에게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어머니의 손맛을 계량화하여 작성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55) 『조선요리제법』의 초판은 1917년 신문관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조선요리제법』은 1943년까지 총 11판이 발행되었다.

<그림 7> 『조선요리제법』의 저자 방신영

『조선요리제법』의 저자 방신영

* 출처: 이화가정학50년사

1913년 『요리제법』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판본이 확인되지 않고 관련 광고도 찾아볼 수 없다.56) 요리책 저술 이외에도 방신영은 여성 잡지 『신가정(新家庭)』에 식단표와 요리법을 기고하였고,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에는 조선 요리 및 생활 개선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 음식 만드는 법』,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 『다른 나라 음식 만드는 법』 등의 요리책을 저술하였으며, 『음식관리법』 등 음식관리에 대한 책과 가사 교과서도 다수 집필하였다. 방신영은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정신여학교를 1910년도에 졸업한 방신영은 모교, 경성여자상업학교, 광주 수피아학교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57)58)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고 난 후 1926년부터 1929년 1월까지는 정신여학교 가사과 선생으로 부임했다.59)

1929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는 기존의 2개 학과(문과·음악과)에 가사과를 추가로 신설하면서 방신영을 교수로 초빙했다. 이 때 헤리엇 모리스(Harriett Morris, 1894~1997), 김합라(金合羅?~?), 장기원(張起元, 1903∼1966)과 함께 가사과 교수가 되었다.

3년이 지난 1932년 4월에는 모리스, 김합라와 함께 가사실습소를 송월동 인왕산 측후소에 세우고 이론·실습. 1932년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 4회로 입학했던 안현민은 당시 본인이 들었던 가사과 수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염색·뜨개질·요리 등의 수업은 모두 실습 위주였는데, 방신영이 담당한 요리의 경우 한식은 상궁이 나와 가르치고, 중국 요리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요리집의 주방장이 가르쳤으며, 서양 요리는 태화관에서 일하던 분이 나와 캔디와 쿠키 만드는 법까지를 가르쳤다고 하니 가히 최고 수준의 강의를 받은 셈이었다.60)

방신영의 경우 가사과에서 담당한 과목은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61)과 “재봉·요리법”62)이었다. 직접 실습을 담당했거나, 위의 회고처럼 각 요리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해 실습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평교수로 재직한 이후 이화여전이 현재의 신촌 캠퍼스가 있는 자리로 이사하고 난 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가사과 3대 과장을 지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1937년을 기점으로 교직원들의 인사이동이 잦아지면서 1939년 9월 방신영 또한 가사과 과장에서 물러나고 1940년에는 사임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난 후 청년 훈련소인 연성소(練成所)가 된 이화전문에서는 조선요리 과목에 다시 유복덕, 조숙임과 함께 방신영을 초빙하였다. 그리고 1952년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방신영은 이화여자대학교 가정학과에서 요리를 가르쳤다.

방신영은 조선 내의 대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외국의 가정학을 경험하였으며, 일본을 2번, 미국을 1번 방문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2년간 동경영양학교(동경영양학원 혹은 영양연구소)63)에서 과정을 수료하였다.64)

동경 영양학교는 사이키 타다스(佐伯 矩, 1886~1959)가 개교한 영양학 교육기관으로, 아시아 최초의 영양학 전문학교이다.65) 방신영은 이곳에서 전문적인 영양학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38년에는 다시 일본 동경에서 1년간 연수했다.66)

해방 이후 방신영은 헤리엇 모리스가 가정학을 전공했던 캔사스주립대학교 가정학과에 초청받아 1년간 유학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방신영의 미국 방문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실현되었다.

모리스는 방신영에게 요리를 배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국인에게 조선 요리를 알리기 위해 『조선요리제법』을 기반으로 한 『Korean Recipes』을 미국에서 출판했다.67) 이 책을 판매한 수익금을 적립하여 자신의 모교로 초청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68)

두 번째는 미군정청 문교부에 의해 1946년 대학교수의 자격규정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여자대학교가 기존의 교수진에게 해외 유학의 기회를 적극 추진하게 된 것이 그 이유이다. 이 때문에 방신영의 미국 방문은 미국 각 대학의 가정학 교육을 시찰하는 목적도 겸하였다.69)

그리고 방신영은 식민지시기 여러 모임과 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야학이나 요리 강습회 등에서 여성의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여성 관련 운동에도 관여하였는데, 방신영은 YWCA(여자기독교청년회)의 설립에 참가해 1922년 김활란(金活蘭,1899~1970), 김필례(金弼禮,1891~1983)등과 함께 강습회를 개설하였다.

또한, 1927년 초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여성 단체에서도 좌우통합을 위한 근우회를 조직하였는데, 방신영은 여기에 참가하여 근우회 발기인, 창립준비위원 재무부, 집행위원 재무부 등 중앙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던 방신영은 1923년에는 민립대학 발기인이었으며, 1934~1935년에는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방신영은 이화여자대학교 정년퇴직 후에도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1949년에는 문교부 생활개선과에서 음식 분과위원으로 추천되었다.

이 생활개선과에서는 의례, 도의, 의복, 음식, 주택의 각 분야가 있었으며, 방신영은 최이순, 이규학, 조기홍, 오억 외의 5명과 함께 선정되었다.70)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에서 1968년 과학공로자(영양학 부분)으로 선정되었다.71)

또한, 1968년 2월 연세대학교 가정학과에서는 방신영에게 공로 표창을 수여했다. 방신영은 1977년 1월 5일 오전 8시 88세의 나이로 자택인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년 5월 6일 가사과 동창들은 홍성교회 묘지에 방신영의 묘비를 건립했다.

묘비를 건립하는 날 모금한 돈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내 모리스관 시설비를 마련하는 데 기탁하였으며, 모리스관이 완공되고 난 뒤 방신영 기념실에 동판 제막식을 거행하여 방신영을 추모했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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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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