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4월 20일 『조선요리제법』의 저자 방신영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작권자 강의영을 대상으로 경성지방법원에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233)
그 이유는 1917년 출판된 원고 방신영의 저작물 『조선요리제법』을 피고인 강의영이 1924년에 이름만 바꿔 출판하였으며, 전체 내용을 모두 복사하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고 방신영은 손해비용으로 피고 강의영에게 2500원을 청구하였고, 이는 그 당시 상당한 거금이었다.234)
1933년 7월 21일 방신영은 승소하였으며 경성지방법원은 피고 강의영이 원고 방신영에게 350원을 지불하고, 『조선요리제법』을 다시 발매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235) 그러나 이 사건은 이에 그치지 않고 강의영이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 민사부로 넘어가게 된다.236)
경성복심법원에서는 항소를 기각하고 방신영의 승소를 인정하였다. 복심법원 판결문의 요약을 참조하면, 방신영의 책을 모두 복사하였다는 조선중앙일보의 기사와는 달리 내용을 “개찬(改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장에서 살펴보았듯이『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조선요리제법』의 내용을 참조하였으나, 그 외에도 다수의 책을 참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법정에서 크게 대두되지 못했다.
『조선요리제법』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표절 소송은 저작권의 개념과 요리 지식의 전승과 맞물리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10년 식민지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의 저작권법이 시행되었으나 이는 원칙적이었을 뿐 저작권 침해로 보이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공식적인 최초의 저작권 침해 사건은 1908년 현채가 교과서의 무단 전재를 고발하고 저작권 사용료를 요구한 것이다. 몇몇 저작권 침해 사건이 이 이후에도 공공 지면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방효순은 비창작적 저작물의 경우에는 저작권 침해여부를 판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1924년 김동진이 본인이 출판한 소설 『현토 옥루몽(懸吐 玉樓夢)』과 김익수가 발행한 동명 소설이 유사하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김익수는 『옥루몽』은 이미 저작권이 소실된 공공영역의 저작물로 누구나 토(吐)를 붙여 발행·판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37)
조선시대 집필된 소설 『옥루몽』이 출판되는 과정에서 이런 부침을 겪는 것은 이 당시 과거의 저작물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남용되어 발행되었고, 원본에 대한 판권을 주장하거나, 영인본에 대한 판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관행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문자로 전승되던 소설이 필사본에서 출판인쇄본으로 발행되는 과정에서 저작권의 문제와 함께 결부되었다고 볼 수 있다.『조선요리제법』의 경우 실제 방신영이 승소하여 강의영이 벌금을 납부했으나 승소 이후에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3판이 1936년 발행되는 등 저작권법이 크게 실효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 『조선요리제법』의 요리법을 일부 참조하여 작성한 것은 사실이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내용, 저자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나 『임원경제지』『정조지』 등의 앞선 요리책을 원본으로 삼아 참조한 내용도 발견되므로 반드시 『조선요리제법』을 표절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방신영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또한, 방신영의 조카 이석만이 발행한 『간편조선요리제법(簡便朝鮮料理製法)』 1934년판본의 목차를 확인하면 방신영의 책과 거의 유사하며, 목차나 요리법을 대조해볼 때 거의 일치할 정도로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238)
그러나 필사본과 필사본, 필사본과 출판인쇄본(간행본) 사이에 요리책의 내용 이 중복되는 현상은 외국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사례에 속한다. 1475년경 인쇄기로 제작된 세계 최초의 요리책을 쓴 바르톨로메오 데사키(일명 플라티나)가 책에 포함된 250가지의 요리법 전부를 마르티노의 필사본에서 베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 중 10가지는 아키피우스의 요리책에서 가져온 요리법이었다. 그러나 플라티나는 이탈리아어로 된 마르티노의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도입부를 쓰고 건강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플라티나가 쓴 출판인쇄본 라틴어 요리책은 전 유럽에서 번역되었고,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239)
요리책의 개념을 정의한 헨리 노태커(Henry Notaker)의 경우 스테판 메넬(Stephen Menell)의 논의를 좀 더 발전시켜240) 요리책의 표절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241) 그는 “...초기 현대사에서의 ‘표절’이라는 개념의 관계를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기사에서 이 단어를 쓴 이유는 이것이 그저 초기 텍스트에서 베껴온 텍스트를 표기하고자 함이다...”242)라고 하면서, 이런 표절이 요리책뿐만이 아니라 초기 출판 텍스트에서 만연한 현상이었다고 서술한다.
또한, 요리책 가운데 국가 간 번역본이나 편집되고 수정된 모음집(Compilation)이 많았다는 점에서 요리책 연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요리책을 텍스트 별로 먼저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자칫 당대를 무조건적으로 반영하는 사료로만 사용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3)
14세기부터 현대까지 요리책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기술한 Anne Willan도 출판인쇄기술이 책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점에 입각하여 요리책의 변화와 저작권의 문제를 간략히 설명했다.
특히 헨리 노태커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많은 요리책에서 정보가 겹치는 경향이 있지만, 표절의 문제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당대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서서히 싹트는 시기였고 몇 세기에 걸쳐 요리의 창조성이 예술적 자산으로 인정받는 풍조가 발전되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저자에게서 창조적인 영감을 받는 행위와, 무조건적인 표절 행위 간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고 덧붙인다.244) 문자적 전승과 표절의 경계는 비단 요리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같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가정보감』류의 책에서도 1926년판 『최신언문무쌍가정보감』의 “신부음식금기”의 내용이 『규합총서』의 “금기”와 겹친다는 사실이 증명된 바 있다.245)
또한 노상호는 점복술이 가정보감류에서 빈번히 등장하며 오행점의 정보가 1962년 대구에서 발행된 『가정백사길흉보감』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상업출판물들이 전통지식의 매개체역할을 맡았다는 점을 시사한다.246)
여성 독자를 위해 출간된 가정보감류와 여성 독자를 독자층으로 확보하는 요리 서적류는 신여성과 구여성 독자를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과거의 책에 의존하는 방법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상업적 이익을 내려 하는 출판사가 책을 빨리 출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책을 그대로 내거나 수정하는 것이 간편한 방법이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내용이 다수 앞선 책에서 비롯된 것은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요리가 도입되어 ‘신식’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여학교를 대상으로 가사교육 과정이 증가하면서 1930년대 방신영은 요리책을 개편하여 작성했고, 『조선요리제법』의 요리법 에서는 더 이상 『부인필지』의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정되었다.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