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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리서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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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0. 출판인쇄기술과 지식 전승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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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독서계 상황과 독서집단

조선시대 독자는 문해력을 가진 지식인들로 제한되었다. 또한 장서(藏書)는 귀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필사본은 특성상 여러 부 발간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독자를 고려한 책이 아니었으므로 지식은 소수의 식자층 사이에서 전파되었다.

목판본이나 활자본의 경우는 여러 부수를 찍을 수 있어 기억을 보존하기에 유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이 민간으로 확장되지 못하였으므로 독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조선시대 다수 편찬되고 언해(諺解)되었으며, 삽화가 포함된 이유는 민간을 교화하겠다는 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219) 즉, 책을 가진다는 것은 문자 권력을 보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요리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의 경우 독서를 통해 한문으로 지식을 재생산하기에 이르렀으나, 필사본이었기 때문에 가문으로만 전승되는 한계를 가졌다.

예를 들어 『규합총서』를 저술한 빙허각 이씨가 대표적이다. 빙허각 이씨는 달성 서씨 집안이 소장하였을 법한 여러 장서(藏書)를 보고 내용을 가져오거나 가져올 때 직접 실험을 해보기도 하였으나,220) 이는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지 못하였다.

『규합총서』의 내용은 개화기 이후 발행되는 『부인필지』에서 반복되며 대다수의 독자를 만날 기회가 주어졌지만, 경성이라고 하는 공간에 한정된 측면이 있으며, 독자가 요리책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근대적인 학교교육이 전면화 되고 문맹률이 낮아지고 난 이후인 1920년대~1930년대에는 학생, 노동자, 여성 등의 다양한 독자층이 가시화되었다. 식민지시기 독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출판량이 높고 당시 성격이 독특한 소설과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르면 독서의 방식은 초기에는 낭독과 음독을 중심으로 하였고, 이후에 인쇄기술의 발전과 편집 기술에 따라 묵독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드러난다고 본다.221)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1920년대의 독서층의 형성에 대해 연구한 천정환은 요리책을 실용서로 간주한다.222)

실용서는 다른 말로 매뉴얼(manual)에 해당하고, 기술서라는 측면에서 요리책은 요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도구이자 매체이다. 1920년대 사상과 문학영역의 서적보다도 교재 수험서와 실용서가 독서비중을 다수 차지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요리책은 비록 다량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여성교육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전근대시기 대부분 구술과 신체로 전승되었던 요리 지식과 기술이 요리책에서는 문자화되었고, 기능의 습득이 문자로 기록된 책을 통해 재현되었다.『조선요리제법』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앞의 2·3장의 광고를 다루면서도 살펴보았듯이 가정의 부인과 여학생들을 독자층으로 목표로 하여 발행되었다.

근대적 여성 주체로 대두된 “신여성(新女性)”은 독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소설류의 문학을 즐겨 읽었다.223) 그러나 그 당시 여성은 주부(主婦),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어야 한다고 권장되었으며, 여학교에서는 여성의 성역할을 전제로 하는 가사와 가정학을 수업 과정으로 편성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쳤다.224)

특히 이 당시 여학교의 교육과정은 일본의 ‘양처현모(良妻賢母)’사상에 영향을 받아 ‘근대 국민 만들기’를 강조하였고 여전히 남아있는 전근대 시기의 여성관도 결부되어 혼재하고 있던 판국이었다.225) 여성들은 취업의 기회가 극히 적었으며, 가정을 주관해야 하는 성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226)

<표 23> 이화여대 가정학과 초기의 조리실습 광경(정동, 1930)

이화여대 가정학과 초기의 조리실습 광경(정동, 1930)

* 출처: 『이화가정학50년사』

위는 실제 여학교에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을 다고 있다. 위의 사진은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서 1930년 조리를 실습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외국인 여교사가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학생들은 앞치마를 매고 감자나 양파처럼 보이는 둥근 재료를 작은 칼로 손질하고 있다. 이 중 사진의 맨 왼쪽 중간쯤에 위치한 여학생이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작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즉 가사실습을 배우는 여학교의 경우, 가사교과서를 보면서 실제로 요리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정부로부터 인가받았던 교과서 중 가장 최초의 요리교본은 1900년대~1910년대 현공렴이 발행한 『한문가정학』, 『신편가정학』, 『신정가정학』이다.

이는 일본의 교과서를 원전으로 삼고 있다. 이 교과서의 내용에는 집안사람의 감독, 예의범절, 위생, 일가의 재정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위생에 음식 항목이 포함되었다.227)

실용적인 지식을 목표로 하는 일본 가정학의 영향력이 이 당시 여학생 독자들에게 미쳤으나, 이후 이화여전 등의 미션스쿨에서는 미국의 가정학이 도입되면서 김합라, 최이순 등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들은 미국의 가정학에 영향을 받았다.228)

방신영 등의 교수에게서 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여성들은 정규 교육을 받으면서 가사·가정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은 영양과 위생을 학습했다. 이 상황 속에서 가정 안에서 가사를 담당해야 하는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하는 담론과 이에 반발하고 관념적인 여성 교육을 비판하는 의견도 제시되기 시작했다.229)

이지연과 전상숙은 이를 가사학과 가정학이 ‘여성적’인 학문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동시에 여성들에게 해외로도 나갈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30)

즉 비록 여성들은 여전히 현모양처 여성관과 가정주부라는 담론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사교육은 ‘위생’과 ‘영양’이라는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는데 일조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 독자들을 위한 가정 관련 책으로는 가사교과서뿐만 아니라 “가정보감(家庭寶鑑)” 등의 가정백과사전 또한 상업출판되었는데, 가정보감에 포함된 요리 관련 지식을 다른 가사에 필요한 지식과 함께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광한서림(廣韓書林)에서 발행된 『溫各去是 家庭要鑑』에는 1)병이 났을 때 대처하는 법 2)화학공예품제조법 3) 각국의 언어 4) 도량환산표 5) 점치는 법 6)부적 등의 그야말로 ‘온갖’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데, 그 중 병에 나쁜 음식, 식료품 저장법, 식료품 저장법, 식료품 감별법, 갖은 식료품에 대한 상식, 어떠한 음식이 몸에 유익한지,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대한 상식도 수록되어 있으며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었다.231)

책표지에는 여성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여성에게 필요한 상식과 지식을 수록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가정요감 등의 책을 통해서도 여성 독자들은 지식을 얻었던 것이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은 전체의 1.9% 정도였으므로, 1920년대~1930년대 여성 내부에서는 문자권력의 계층적 차이가 확연했다.232) 근대적 매체인 신문을 통해 가정과 가사에 대한 신지식을 접할 수는 있었지만, 그 당시 전체 여성 가운데에서 그 비중은 그렇게 높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문맹이 아닌 소수의 여성만이 이런 지식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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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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