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여럿이니 집안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석보로 이사한 지 몇 해 후 어린 계집종 하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계향은 종을 안아 안방에 뉘여 두고 손을 따고 코를 빨았다. 계향의 의식 속엔 종과 상전이라는 구분이 없었다.
신분이 엄연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며느리 박씨는 그런 시어미를 보고 놀라 말했다. “어머님, 병 걸린 종년을 행랑에 맡기시지 않고 어찌 안방에 들이십니까. 행여 역질이라도 걸렸으면 어쩌시려구.” “그렇지 않다, 아가야. 종년도 우리 집에 온 귀한 손님이다.
내 보기에는 그저 심한 고뿔에 걸렸구나. 몹쓸 병이 아니니 안심해라.” 역병은 두려운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한번 역병이 돌면 심한 경우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기도 했다. 역병에 걸린 환자와 대면을 하거나 접촉을 하는 것은 극도로 금기시 되었다.
민간에서는 그 치료를 무속적인 의식에 기대는 경향이 컸으나, 굿을 금기하는 반가(班家)에서는 보통 약재를 넣은 음식으로 다스렸다. 계향이 끓인 것은 자라탕이었다. 말발만한 자라를 먼저 머리 베어 피를 내고 끓는 물로 긁어서 허옇게 씻은 후 진국장에 달여 생강, 천초, 후추, 염초장으로 양념해 마신다.
자라탕은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계향이 자라탕을 몸소 고아 종에게 숟갈로 떠 넘겨주는 모습은 딸자식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그걸 보는 종복들을 감격하게 했다. 이웃 농가의 어린 여식들이 석계 집안에 종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할 정도였다.
계향의 아들들은 이제 영남 유림 전체가 우러르는 선비가 되어있었다. 첫째 상일은 서른둘에 이미 단산 서원 원장이 되어 집을 떠나 있었다. 둘째 휘일도 일찍 죽은 숙부 시성의 양자로 들어갔다. 휘일은 나이 열셋에 이미 외조부 흥효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맹자와 주역을 연구했다.
휘일은 주역의 선천후천설과 주돈이(周敦頥)의 태극설에 깊은 관심을 보여 도학을 궁구했다. 역학을 비롯해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궁구하고 선현들의 인(仁)에 대한 언구들을 모아 구인략(求仁略)이라 이름짓고 암송하였다. 휘일은 젊은 나이였으나 행동거지가 진중하고 침착했다.
휘일의 문명(文名)은 영남 유림들의 주목을 받았고 나이 서른에 이미 퇴계학의 중심인 도산서원의 수장이 되었다. 셋째 현일은 키가 훌쩍 컸고 체구도 좋았다. 그는 마당을 쓸던 하인놈이 잡담을 하면 당장 불러서 혼을 내곤 했다. 크게 소리치지는 않았지만 하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현일은 아버지 시명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 겪었던 병자호란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도의가 더럽혀진 수치심이었다. 그랬지만 그는 산골에 처박혀 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은 싫어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를 봐서 두 번이나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확인이었을 뿐 벼슬에 몸담기 위함이 아니어서 매번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일에겐 열여덟에 시집 온 아내 박씨가 있었다. 박씨에게 현일은 두려운 사람이었다. 조선 천지 어디 내놔도 밑지지 않을 선비였으나 아내에겐 결코 자상한 남편이 아니었다.
박씨는 계향과 시명처럼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박씨가 들고 간 음식상을 차갑게 물리는 현일을 계향은 여러차례 목격했다. 사내가 제 아내에게 차갑게 구는 것은 어리석음 중에서도 가장 큰 어리석음이 아닌가. 석보 땅에는 동아가 잘 자랐다.
동아는 1년생 넝쿨식물로 박덩이같은 열매를 달았는데 이렇다 할 맛이 없이 덤덤했다. 가을이면 계향은 동아적이나 동아누르미를 상에 올렸다. 그 일을 계향은 일부러 현일의 처 박씨를 데리고 했다.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거든 내가 없더라도 밥상 위에 동아를 자주 올리도록 하여라.”
계향은 박씨에게 동아누르미와 동아적 만드는 법을 자세히 일러주면서 내가 죽으면 이런 것을 누가 가르치나, 가만히 근심했다. 저녁상에 동아를 올린 날 계향은 일부러 아들의 밥상머리에 앉았다. “이 동아를 봐라. 동아는 어떤 밭에서나 쉽게 자란다. 여염집 뒤뜰에서 우연히 씨가 떨어져 자라기도 한다.
너희도 동아요리를 어려서부터 흔하게 먹어왔지 않느냐. 그런데 동아 요리가 값어치가 없더냐? 동아는 구중궁궐의 수라상에도 올라가는 음식이니라. 동아는 산삼이나 전복 같은 귀한 재료와 나란히 오르기도 하고 가장 천한 종년의 밥상에도 올라간다.
실로 군자가 있어 그를 요리에 비한다면 그것은 동아와 같은 거라고 에미는 생각한다.” 어머니 계향은 온화하게 말했지만 현일에겐 통렬했다. 현일은 묵묵히 동아적을 씹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네가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네 아내에게 따뜻하게 대하고 사람들에게 어질게 대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기쁠 것이다.”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거듭하며 계향은 자신이 점점 늙어감을 느꼈다. 늙어간다는 것은 넉넉함이었다. 이제 계향은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 계향이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것은 대략 마흔여덟쯤 되면서 부터였다. 어느 날 손자 하나가 먹은 것을 토해내다 혼절한 일이 생겼다.
의원이 멀리 있는데다 급하였기에 계향은 집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약을 짓기로 했다. 재료가 무엇인지 처방을 써서 아들들에게 구해오라고 시켰다. 출가 전 익힌 적이 있던 의료서적을 기억해본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계향의 처방대로 지은 약을 먹고 한 시간도 안 되어 깨어났다.
그 날 상일과 휘일, 현일 형제가 놀라 어머니께 나란히 석고대죄를 청해왔다. “소자들이 어리석어 매일 어머니의 훈육을 받으며 이처럼 자랐으나 어머니의 학식이 이토록 높은 줄은 살피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의 죄가 무겁고 큽니다. 어머니께서는 부디 미욱하고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깊은 학식을 저희를 위해 풀어놓아주옵소서.”
계향은 아내와 어머니로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는 체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어엿한 선비로 자란 아들들이 진심으로 가르침을 청하자 마음이 움직였다. 아직 막내 운일은 어려 품 안에 있었으나 성숙한 아들들의 그런 모습은 계향의 숨은 선비 기질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계향은 자신에게 새로운 시절이 열렸음을 느꼈다. 다시 서책을 펴고 종이와 붓을 가까이 했다. 음식을 만들고 길쌈과 침선을 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제한할 게 아니라 내재한 문기를 발휘해도 상관없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