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을 차린 시명이 맨 처음 내린 결단은 이사였다. 좁은 골짜기인 한밭골 아닌 후일을 대비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 나라골에서 40리 떨어진 양지바르고 아담한 마을을 찾아낸다. 이름이 석보라 했다. 그 새 식구가 많이 늘어 상일이와 큰 딸아이, 휘일과 현일과 숭일과 정일, 융일이와 여식 둘 해서 9 남매나 되었다.
석보로 이사하기 전 휘일은 처를 맞았다. 휘일의 처 박씨는 무의공 박의장의 손녀였다. 순절한 충효당의 둘째 며느리 박씨의 조카뻘이었다. 박씨는 기질이 영민하고 유순하여 시어머니 계향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했다. 휘일의 혼례는 시명 내외의 우울한 생활에 작은 기쁨이었다. 계향은 며느리에게 이런저런 부엌일을 가르치면서 전에 못 느끼던 기꺼움을 경험하곤 했다.
석보에서 시명 내외는 숲속에 대를 짓고 모옥을 얽었다. 그리고 인근 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시명 내외는 이전 어느 때보다 일상이 홀가분해졌다. 물이 맑은 석계(石溪)위에 집을 짓고 시명은 스스로 호를 석계라 지었다. 계향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며느리들과 함께 생치(生雉:꿩고기)를 다듬어 김치와 짠지를 만들었다. 겨우내 저장해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김치였다.
휘일 처는 생치 김치를 처음 본다 했다. “생치 김치는 이렇게 만든다, 아가. 간이 든 오이지의 껍질을 벗겨 속을 제거해 버리고, 가늘게 한 치 길이 정도로 도톰도톰하게 썰어라. 삶은 꿩고기도 그 오이지 크기로 썰어서 물과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김치처럼 담가 삭혀서 쓰면 되느니. 또 꿩고기를 동글동글하게 썰어서 간장기름에 볶아 쓰면 생치 짠지가 되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점점 맛이 난다. 짠지나 김치를 독에 담을 적에는 천초나 후추로 양념하면 맛이 좋고 오래 두고 먹기에도 좋지.”
“어머님, 남쪽 지역에 고초라는 식물이 재배된다고 하옵니다. 천초나 후추보다 기르기가 쉽고 빛이 붉으며 향이 맵고 강하다 합니다.” “나도 산청할매가 친정 길에 가지고 온 것을 본 적이 있느니. 그러나 맛이 매워 음식에 그냥 쓰기는 적합치가 않더구나.” 고부는 도란도란 단란했다.
임란이 끝난 후 태어난 계향이니 고추를 모를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요리에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매운 고추가 훗날 김치에 빠지지 않는 양념이 될 줄을 계향은 짐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계향이 살던 영양은 일교차가 심하고 건조한 날이 많아 훗날 한반도의 고추 주산지로 자리 잡게 되니 공교로운 일이다.
석보로 이사하면서 시명은 계향이 열 네 댓살 때 쓴 경신음, 소소음, 학발첩 같은 것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시명은 계향의 문재(文才)에 대해서는 따로 들은 바가 없었다. 경당선생의 따님이니 자연히 글을 읽는 환경에서 자랐으며 여사서와 소학을 암송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시명의 눈앞에 펼쳐진 시는 놀라운 것이었다.
글씨 또한 눈부셨다. 도저히 십대의 아이가 썼다고 믿을 수 없는 경지였다. 커다란 호랑이가 포효하는 그림도 한 점 있었다. “이건 언제 그렸소?” 시명은 이제 머리가 희끗해진 계향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 민망합니다. 다 없앤 줄 알았더니 그게 춘파 사랑에 남아 있었던 게로군요.” 계향은 수줍어했다.
“내가 이제 보니 여간 아닌 큰선비를 반려(伴侶)로 삼고 동행해왔구려” 시명은 기쁘게 말했다. “이걸 자식들에게 대대로 전합시다. 저희 조상의 어릴 적 솜씨라고 두고두고 보여줍시다.” 이후 시명은 부인 계향의 시문을 정성스레 필사하였다. 후일 길쌈과 자수에 능한 며느리 박씨를 시켜 계향이 지은 시로 수를 놓은 서첩을 만들게 했다.
* 안동장씨가 지은 시 두편를 남편인 석계 이시명(1590-1674)이 쓰고 며느리인 무안 박씨가 수를 놓은 것으로 재령 이씨 영해파 문중 유물
글씨와 글과 수, 세 재능이 어울린 이 물건이 바로 영해 재령 이씨 댁에 오랫동안 전해지는 전가보첩(傳家寶帖)이다. 시명은 석보의 언덕을 거닐며 시를 지었다. 인근 빈민을 구휼하기 위해 심어놓은 도토리나무가 즐비한 언덕이었다. 삼남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귀해지면 경상도 동쪽의 빈민들은 석보로 몰려들곤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기는 석계 댁도 마찬가지였으나 거기엔 그나마 도토리가 있었다. 쓰디쓴 열매였지만 쌀이나 보리를 조금 넣고 죽을 쑤면 허기를 때울 만은 했다. 보릿고개가 한창일 무렵 계향은 지난 가을에 갈무리한 도토리를 꺼내어 집앞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죽을 쒔다.
시아버지 함이 살아있을 때부터 늘 해 오던 일이었다. 시명은 나이 들면서 더욱 세상과 멀어졌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부드러웠으나 대쪽같이 꼿꼿한 성정을 누르지는 못했다. 계향은 그런 시명을 이해하고 존경했다.
그렇지만 시명과는 달리 넉넉하게 세상을 품어 안았다. 어머니란 열두 폭 치마폭으로 잘잘못을 품어 안지 않고서는 자식들을 기를 수가 없다. 시명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으나 계향은 지아비가 언제든 피로한 등을 기댈 수 있는 다사로운 품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