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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리서 이야기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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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7. 장계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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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음식 하나에 천하의 도를 모아놓다

1633년 흥효가 돌아간 이후, 세상은 거칠게 요동쳤다. 우선 이듬해 충효당에서 당주인 운악공 이함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채 탈상을 하기도 전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봄 삼전도에서의 굴욕적인 강화가 이루어졌다. 시명이 기력을 잃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인조임금이 심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듣고, 시명은 주저앉고 말았다. 비천하고 무도한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 고개 조아린 임금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시명은 임금의 치욕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알았다. 시명은 진작에 벼슬길을 접었지만 암만 귀를 막아도 치욕은 점점 가슴 안으로 칼날을 들이밀었다.

시명 부부는 어머니인 진성이씨를 모시고 선친인 운악공의 산소가 있는 영양의 한밭골로 살림을 옮겼다. 그 무렵 시명은 조정에다 절절한 울화와 피토하는 충정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임진년 난리에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며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인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요지의 상소였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시명은 모함을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시명은 태연하고 자약하게 포승줄을 받았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이마를 조아린 마당에 나 하나의 옥사가 무슨 상관이랴. 자신을 옥에 가둔 사람을 원망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고 되려 달갑게 받아들였다.

시명의 그런 모습은 주변 사람을 감화시켰다. 벼슬을 탐내 상소를 올린 게 아님을 알게 되고 곁에서 보니 과연 결곡하기 짝이 없는 선비임이 드러났다. 머지않아 풀려나 한밭골로 돌아왔으나 시명은 생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계향 역시 의리와 도의가 목숨보다 귀했다.

청나라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조정의 움직임에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은 시명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조건 절망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계향 부부에겐 이미 상일과 휘일 말고도 셋째 현일과 넷째 승일과 다섯째 정일이 있었고 또 여섯째 융일이 갓 태어나 어미의 가슴을 파고들며 젖을 빨고 있었다.

나라의 치욕에 입맛을 잃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 아이들을 품어 안고 기르고 가르쳐서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야 한단 말이오.” 계향이 상을 차려오면 시명은 숟가락도 대지 않고 한숨지었다. 겉모양은 눈에 띄게 수척해 갔다.

원래 시명은 많이 먹진 않아도 음식을 달게 드는 편이었다. 반찬을 조금씩 담아 5첩가량 올려도 천천히 깨끗하게 비워 계향을 기껍게 했었다. 작년 가을엔 섭산삼을 맛보더니 “부인, 이건 어떻게 만들었소?” 물었다. 더덕을 두드려 찹쌀가루를 묻혀서 참기름에 지진 후 꿀에 재웠다고 답했더니 이렇게 굵은 더덕은 어디서 났느냐, 이만치 자랄려면 얼마나 걸리느냐, 만드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를 물었다.

그리고는 “겨울 땅의 매운 맛과 여름 하늘의 서늘한 맛이 뿌리에 가서 쌉쌀하게 맺힌 것을 참깨 기름으로 고소하게 녹여놓았구려. 가히 대지의 향기라 하겠소. 거기에 꽃송이 깊이 숨겨진 꿀을 스미게 만들다니. 당신은 가히 음식에 천하의 도를 모아 놓을 줄 아는 사람이구려.”라고 칭찬했었다.

‘음식디미방’ 식사체험
<‘음식디미방’ 식사체험>

계향은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매양 음식을 만질 때마다 시명이 말했던 ‘천하의 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사랑채에서 나온 밥상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시명이 식사를 잘하지 못하게 된 것은 벌써 보름이 가까웠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계향은 시명의 입맛을 되찾아주기 위해 깊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예전 시아버지가 바닷말을 맛본 후 의욕과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만들어놓고 싶었다. 어느 날 계향은 계집종 갑생을 데리고 사랑채 밖 연못에서 연근 두 뿌리를 캤다. “먼저 연근을 물로 매우 씻어야 하느니라.” 갑생이 연근을 문질러 씻자 “구멍의 크기가 일정하고 구멍 안에 불순물이 없어야 좋은 연근이니라.

식초물을 한 사발 준비하거라.” 이른 후 일부는 기름장에 무치고 일부는 연근 적으로 구웠다. 계향은 시명 앞에 저녁상을 내려놓았다. 소반 위는 단순했다. 무르게 지은 흰밥과 미역을 참기름에 볶아 끓인 국과 연근채와 연근적 뿐이었다. 시명은 놋접시 위에 꽃이 핀 듯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연근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간장과 식초로 무친 연근채 곁에는 밀가루 옷을 입고 노릇하게 부쳐진 연근적이 담겨 있었다. 시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연근채 하나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살짝 데쳐진 연근의 아삭거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시명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내외가 사는 시절은 참 모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기운을 놓아버리면...... 그렇소, 내 당신 뜻을 알겠소.” 시명은 계향의 의중이 고스란히 상위에 올라 있음을 느꼈다. 시명은 연근을 오래오래 씹어 삼켰다.

계향은 연근이 기력 회복과 울화 해독에 효험이 있다고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내 치욕을 이겨내겠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겠소 ” 연근적을 삼키는 시명에게서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소반 위로 떨어졌다. 그날 시명은 밥그릇을 반이나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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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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