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초봄, 계향 나이 스물여섯에 친정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충효당에 돌아와서도 계향은 죽은 어머니의 영상이 떠나지 않았다. 흥효는 홀로 배움을 궁구하는 삶을 살았다.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의 삶은 외로웠다. 혈육이라고는 계향 하나밖에 남기지 못했고 자신의 형제들도 없었다.
‘이제 어머니마저 아니 계신다’는 아버지의 고적함을 생각하면 계향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을 만큼 마음이 헛헛했다. 계향은 며칠간 고민 끝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친정인 춘파로 돌아가 머물면서 아버지가 후사(後嗣)를 얻을 수 있도록 재취부인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윗동서가 두 명이나 순절하여 충효당에도 살림을 할 며느리의 존재는 절실했다. 그러나 시명은 계향이 편한 잠에 들 수 없을 만큼 아버지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명은 넌지시 계향에게 말했다. “춘파로 가서 장인어른이 새 장모님을 얻도록 조치해 주고 오시오. 이곳은 내가 맡을 테니 걱정말고.” 계향은 남편의 뜻이 고마워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몇 가지 간단한 세간과 이제 막 <소학>을 뗀 상일과 글을 읽기 시작한 둘째 휘일과 셋째 현일을 데리고 계향은 친정으로 돌아갔다. 시명은 철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다녀갔다. 함은 안동부로 오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사돈 식구들과 손자들을 위해 굴비며 육포며 김과 새우젓과 소금 등을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
계향은 경당선생에게 이웃마을의 혼기 놓친 처녀를 맺어줬고 2년 후엔 꿈에도 그리던 후사를 얻었다. 스물일곱이 되어 처음으로 얻은 동생들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철견(鐵堅)이라 지었다. “새어머님. 오늘은 아버님께서 즐겨 드시는 음식 몇 가지를 일러 드리겠습니다.”
어린 새어머니에게 계향은 요리를 가르쳤다. “암탉 두 마리와 마른 대구 세 마리를 머리뼈까지 한데 넣어 맹물에 푹 곱니다. 뼈가 녹도록 고아지거든 건져 버리고 그 물에다가 진간장 한 되와 참기름 한되, 후추, 산초를 섞어 싱겁게 간해서 다시 푹 끓입니다. 간이 들거든 묵 하듯이 하여 놋양푼에 담아 식히셔요. 국물이 다 식어 엉기면 삶은 고기를 삐지듯 엷게 삐져서 초간장을 찍어 드시도록 하셔요.”
재취를 얻은 후 경당은 10여년을 더 살았고 후취 권씨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계향이 다시 충효당으로 돌아온 것은 친정으로 간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돌아와 계향은 상일과 휘일과 현일을 다시 아버지의 문하로 보냈다. 이리하여 영해 재령이씨들은 퇴계에서 학봉을 거쳐 경당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도한 학맥을 잇는 우뚝한 봉우리가 된다.
계향이 낳은 자식들이 없었다면 퇴계를 잇는 한국성리학은 그쯤에서 맥이 끊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중년의 계향이 친정에 그토록 오래 머물렀던 것은 아버지에게 계실을 구해드린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더 큰 목적은 장성해가는 아들들을 안동처럼 선비들이 웅집하는 큰 동네에서 공부시키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