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효당에 첫 발을 들여놓다
사랑에 오는 경당의 문도 중에서 영해(寧海) 나라골(현 영덕군 청수면 인량리)의 이시명이란 선비가 있었다. 현감 이함(涵)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진작부터 장흥효의 제자가 되어 검제를 드나들었으나 계향이 시명을 본 것은 그의 나이 스물여섯일 때였다.
약관의 나이에(1612년, 광해군 4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잡한 정치를 본 후에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로 내려와 글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흥효는 그를 특별히 아꼈다. 이시명의 장인인 광산김씨 김해는 스승 학봉이 순국했던 임란 때 안동지방 의병장을 맡았던 인물로, 흥효 역시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경당은 시명을 조용히 불러, 계향의 혼처를 논의하였다. “자네가 내 딸의 혼처를 구해주게” “제가 감이 어찌 스승님의...” 시명은 차마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자신은 계향보다 8살이나 많은데다 전실 광산 김씨의 소생으로 두 아이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풍습으로는 전실 소생 아이가 혼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시명은 유생들 뒷전에서 총명한 눈을 깜박이던 계향의 모습을 여러번 마주친 적 있었지만 차마 자신의 배필로 여겨본 적은 없었다. 영해의 나라골은 춘파에서 아주 멀었다.
어머니 권씨는 무남독녀 외딸을 멀리 시집보내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둘의 혼인은 빠르게 진행됐다. 계향 또한 시명의 높은 이맛전과 서늘한 눈이 싫지 않았다. 말이 나온 지 열 달 뒤 마침내 계향은 나라골 재령이씨 이시명의 아내가 되어 덩실한 가마를 타고 이틀 낮 이틀 밤을 꼬박 걸어 시집을 갔다.
맑고 고운 반변천의 물이 반짝이며 계향의 곁을 흘렀다. 시명의 아버지인 운학공 함은 기가 막힌 죽음을 거듭 겪고 있는 중이었다. 네 해 전엔 시명의 바로 윗 형 시성이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원인 모를 병으로 요절했다. 계향이 시집가던 해엔 맏아들인 시청이 역시 과거 길에 올랐다가 서른일곱 나이로 병사했다.
게다가 이태 전엔 셋째 며느리인 시명의 정취 광산 김씨가 세상을 떴으며 작년엔 둘째 며느리 무안 박씨가 남편을 따라 곡기를 끊어 순절했다.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잇달아 잃고 난 함은 하루아침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어버렸다. 그러나 워낙 국량이 크고 체력도 좋아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침이면 이전보다 더 꼼꼼하게 상투를 빗어 올리고 단정하게 서안 앞에 앉아 더 형형하게 눈을 부릅떴다. 계향이 시집을 간 충효당(忠孝堂)은 겉은 덩실하게 큰 기와집이었지만 그렇게 속은 텅 비어있었다. 충효당에 첫 발을 디디면서 계향은 피부를 눌러오는 통각으로 그 텅빔을 감지했다.
육순을 넘긴 연세에 단 4년 동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잃었으니 함에게 무슨 낙이 더 남아있으랴. “새아가, 너는 우리 집의 보배니라. 너는 내가 존숭하는 경당선생의 핏줄이다. 그러니 우리 집을 정녕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새 며느리를 맞은 시아버지는 스스로 다짐하듯 무겁게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