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고조리서 이야기 Ⅰ.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11. 조선의 브리태니커
  • 이동

h2mark 공자와 음식문화

♣ 밥상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

본 연구는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공자는 정원 관리나 가축 돌보기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독학하여 관리가 되었고, 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지금의 법무부 장관이나 대 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공자의 노력으로 노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진일보하여 뜻을 한껏 펼칠 때가 왔다. 이 때 노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80명의 기녀들과 말들을 노나라 왕에게 보냈고, 음주가무에 취한 노나라 왕은 정치를 돌보지 않았고 잔치만 즐겼다.

왕이 정신을 차리고 좋은 정치를 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공자는 노나라 왕이 제사음식을 나누어주는 예를 어긴 것을 빌미로 결국 55세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서 약 13년간 ‘주유열국 (周遊列國)’이라 불리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굶주림을 견디는 인고의 길을 걷게 된다.

공자의 일생 소원은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에 있었다. 우리 인간은 관계존재이다. 부모 형제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이웃과 사회, 나아가 전 우주로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공자는 공동체 유지의 핵심은 질서와 조화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이는 문명의 퇴보를 의미한다. 어릴 적부터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소꿉놀이로 장난을 하였던 공자는 무너진 주 나라 예치 시스템을 회복해야만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주나라 정치·사회 제도인 예치 시스템은 아버지 문왕(文王)을 이어 주나라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확립하였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주공을 대단히 숭배하여 “나도 많이 늙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1)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공자 초상화

『논어』는 유교의 핵심 경전이다. 총 20편으로 이루어졌고 주로 공자의 가르침이나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이라는 뜻의 「향당」편은 집과 동네에서의 공자의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을 제자들이 기록한 내용으로 다른 종교전통 경전에서는 찾기 힘든 특이한 구성이다.

이는 공자도 우리와 같은 보통의 인간임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흠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향당」편에 나타난 공자의 식생활은 여간 까탈스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곱게 찧은 쌀로 지은 밥과 가늘게 썬 고기를 좋아했으며 쉰 밥과 상한 생선, 부패한 고기는 먹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빛깔이 나빠도 먹지 않았고, 냄새가 나빠도 먹지 않았으며, 요리가 잘못 되어도 먹지 않았고, 제 철 음식이 아닌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고기 등 음식을 자른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간이 맞지 않아도 안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리가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도 않았다고 했다. 공자는 아파도 출처가 불분명한 약은 먹지 않았고, 시장 통에서 사온 술이나 육포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듯 까탈스럽게 군 까닭은 공자와 그의 제자인 증자(曾子)와의 효도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경전인 『효경』첫머리에서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2)라고 하였듯 내 몸의 건강이 효도의 시작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아가 음식은 단지 육체의 건강과 만족을 위하여만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 수양을 통한 예의의 함양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임금이 음식을 내리시면, 반드시 자리를 바로 하고 먼저 맛보시며, 임금이 날고기를 내리시면 반드시 익혀서 조상께 올리시고, 임금이 살아있는 것을 내리시면 반드시 기르셨다.”라고 제자들이 기록 하였다.

자리를 정돈하고 바르게 앉는 것은 아마도 임금이 면전에 있는 듯 공경한 태도를 지키려함이겠고, 먼저 맛보았다는 말은 맛본 후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먹음을 의미한다.

날고기를 받으면 익혀서 조상에게 제사함은 영광을 조상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고, 살아있는 것을 받으면 길렀다 함은 함부로 죽여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 위함 이었다.

또한 향음주례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신 후 나이 든 사람이 먼저 나간 후에 따라 나갔다고 하니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얼마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공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억지로 나오는 것 이 아니라 내면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다.

이는 “군자는 한 끼의 식사 시간 동안에도 사람다움을 어기는 법이 없다.”는 공자의 말이 증명한다. 여기에서 군자는 완전한 인격체를 의미 하는 것으로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대표한다.

공자는 배부르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지 말라 하였고,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하여 몇 달간 고기 맛을 잊 은 적도 있었다. 식사 하다가 혹시라도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배부르도록 먹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연민이 정을 표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거친 밥에 물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로 삼으니 즐거움은 그곳에 있느니. 옳지 못한 부귀영화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라3) 공자는 음식에 대해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시한 가치는 인간의 쾌락적 욕망을 극복하는 안빈낙도였다.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배부름을 구하고, 편안하게 거처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배움을 좋아하는 선비다운 이미지가 아니라고 보았다.4)

심지어 어린이들이 배우는 교재에도 ‘배부르고 따뜻하면 음욕을 생각하고, 춥고 배고픈 가운데 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긴다.’5)고 할 정도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선비의 멋으로 생각했다.

유교의 음식관을 다룸에 있어서 같은 문화권이라도 중국과 한국의 음식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중국의 음식은 거의 불에 익히고 기름에 튀기는 음식임에 비해 한국의 음식은 익히지 않은 소위 냉채(冷菜)가 많다. 음식이나 요리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중국내에서도 차이가 있고 한국에서도 지방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음식문화란 음식물과 요리가 상이하지만 유교문화권의 공유하는 가치관과 문화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유교의 문화가 반영된 음식문화는 ‘조화와 예’라고 할 수 있다.

음식에 깃든 문화 상징성을 읽어 보자면, 동물이 음식을 단지 생존을 해서 먹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존을 위해서 먹을 뿐만이 아니라 격식과 절차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문화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는 관점이다.

또한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의리를 가지고 이를 조리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 민족이 가진 문화적 상징을 읽을 수 있다. 먹고 자고 성을 즐기는 원초적 욕망은 공자가 즐기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자면 공자는 슬픔과 고통 받는 이들 앞에서 식사를 즐겁고 배 부르게 하는 것은 무례 하다고 보았다. 그는 상을 당한 사람에서 식사할 때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6)

공자께서 말하셨다. 나는 우 임금에게서 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변변찮은 식사를 하면서도 제사를 모시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다. 자신의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 의관 제복은 잘 갖춰 입었다. 궁궐 안은 수수하게 차렸지만 경지 사이에 수로를 정리하는 일에 힘을 다 하였다. 나는 우 임에게서 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7)

유교의 음식의 예(禮)는 제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제사와 같은 의식에는 절차와 격식 곧 절문(節文)이 필요했다. 술을 비롯한 음식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자의 소통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을 위해서도 필요로 한 음식이었다.

무릇 예의 처음은 음식에서 비롯했던 것이다. 그 기장을 달군 돌에 볶으며, 돼지를 썰고 구덩이를 파서 동이로 삼고 손으로 훔켜서 물을 마시고 괴(蕢)로 북치는 채를 만들고 흙으로 북을 만들었어도 오히려 그 공경심을 귀신에게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8)

음식이 건강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격식과 절차와 그 안에 특정한 가치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평화와 조화를 뜻하는 ‘화(和)’ 라고 하는 단어도 요리에서 음식의 맛을 ‘양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 유교사회에서 음식문화의 하나로 향음주례(鄕飮酒禮)는 손님에게 술을 올리는 절차 였는데, 이것이 단지 먹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인간계를 돈독히 하려는 문화 행위 이기도했다.

쌀밥과 쇠고기는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소는 과거에는 농사일을 할 뿐만 아니라 비쌌기 때문에 소를 잡는 일은 규모가 큰 행사에서 가능했지 오늘날처럼 일상으로 먹기는 힘들었다.

돼지가 희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례는 신령들에 대한 후한 대접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하고, 소중한 것을 희생으로 바치어 존경을 표하는 예의로 간주했다.

자공이 새 달을 고하는데 희생으로 바치는 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 말씀하시기를, 자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9)

공자의 이러한 언급은 혈식(血食) 혹은 혈제(血祭)에 서는 생고기를 바치는 것을 문화적 전통으로 하였음을 보여준다.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를 아낀다.’ 라고 하는 공자의 언급에서 양(羊)이 상징하는 것은 돈이며 시간이며 희생이다.

그리고 예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정이며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돈과 시간과 희생을 바쳐서 인간사회의 안녕, 인간관계의 돈독과 신뢰를 구축한다는 뜻이다. 양이 상징하는 음식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를 매개로 한 소통이 더 문화적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이점에서 살생을 하는 불교는 인간과 동물에 차등을 두지 않고, 유교에서는 이와는 달리 동물을 인간을 위한 하위의 존재이며 인간을 위해 희생으로 쓸 수 있는 음식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음식과 편안한 환경을 꿈꾸기 보다는 정신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물질인 욕망이나 감각적 쾌락에 더 많은 관심을 둔 사람과는 진리를 논의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했을 정도였으며 그러한 전통은 安貧樂道의 유교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사람간의 관계를 위해서는 음식은 필수불가결의 매체인 것이므로 제사에서나 손님을 접대 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국가차원의 제사는 정치행위 그 자체일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종묘사직과 문묘에 대한 의례는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공자는 그러한 제사에서 아낌없이 신령을 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했다. 공자의 이 가르침은 유가의 선비 정신으로 면면이 이어졌다.

우리 선비들은 금이나 옥으로 만든 화려한 그릇 보다 정갈한 질그릇에 담긴 소박한 상을 즐겼고, 죽 한 사발, 밥 한 그릇도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조화로움과 농부의 피땀이 어우러진 결실임을 자각하고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상을 받고 절제를 미덕으로 식생활을 하였다.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