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식생활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주요식량의 생산, 상용 기본식품의 가공법 발달,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는 일상식의 기본양식 정립 등 한국식생활의 기본구조가 성립된다. 철기문화가 더욱 발달하여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고 농경기술도 향상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기본산업으로 되었다.
삼국은 각기 다른 기후와 풍토에 적합한 곡식을 재배하였는데 북부에 위치한 고구려는 밭농사 중심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함께 했다. 토지제도를 정비하여 세제를 정하고, 벼농사에 필요한 관개공사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흉년의 대비와 식량의 원활한 공급을 위하여 진대법(賑貸法), 구휼제도(救恤制度) 등을 제도화하였다.
삼국은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토지 국유제가 원칙이면서도 귀족들, 공신들에게 사유지가 인정되어 계급에 따른 심한 부의 편중을 가져와 귀족과 서민들의 식생활에 큰 차이가 있었다. 중농정책으로 곡물이 증산되고 철제 솥의 보급으로 밥짓기가 일반화되면서 밥이 상용주식이 되고 채소, 육류, 어패류 등을 부식으로 하는 일상식의 기본 구조가 확립되었으며 곡물을 주로 하는 떡, 과정류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밥짓기가 일반화 될 때까지 죽, 떡, 밥은 다같이 상용성을 가졌지만 밥이 상용화된 후 떡은 의례음식화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농산물의 가공방법이 발달하여 술, 장, 김치, 젓갈 등을 만들어 오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엿, 꿀, 기름을 이용할 줄 알게 되어 식생활이 다양하게 되었다.
또한 삼면의 어장을 활용하여 어업기술이 발전하게 되고 조선술도 발달하여 해양어업이 성행하였으며 어획량도 많았다. 백제에서는 서남해의 많은 어장을 보유하여 중국에 그 포획물을 조공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삼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살생금지로 육류음식도 제한이 되었고 어업이 큰 타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생겨났고 다기와 식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때 강정과 유밀과 등 과정류가 등장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독특한 문화를 수용하고 융합하여 보다 화려하고 격조 있는 식생활문화를 전개하였지만 이는 귀족층 일부에 제한되었다. 통일 이후의 시기는 농경이 더욱 발달되고 쌀의 생산이 증가 쌀밥의 주식화가 일반화되어 한국식생활체계가 정착된 시기라 할 수 있다.
♣ 고려시대의 식생활
통일신라 후기의 제도와 풍속을 계승한 고려시대는 불교를 더욱 발전시켜 국교로 삼았다. 살생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육류나 생선류 이용 대신 채식을 주로 하는 식생활이 발달되었다. 어업이나 양축이 금지되어 양곡증산의 필요성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권농정책으로 식량의 증산과 비축에 더욱 힘을 쏟았다.
* 채소음식의 발달과 조미료 사용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채소음식의 발달을 가져왔고 침채형 김치의 체계가 잡혀 한국김치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등 많은 채소가 이용되었는데 이들 식물성 식품을 더욱 맛있게 먹는 법이 강구되어 기름과 향신료의 이용도 많아졌다. 즉, 조미료의 종류가 다양해져 이 시기에 초를 만들어 이용하고 참깨의 재배로 참기름도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차와 과정류 발달
부처님께 차를 바치는 헌다(獻茶)의 예와 풍류로 차를 즐기게 되어 다도의 예절도 생기게 되었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과정류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들 음식은 연등회, 팔관회 등 불사를 위한 국가행사와 혼례, 각종잔치의 필수음식으로 이용되었다.
* 외래식품의 유입과 교류
고려는 건국 이후 문호를 열고 송을 비롯하여 거란, 여진 등 외국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대외정책을 폈다.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교역을 통해 각종 조미료가 유입되었고 특히 송, 원나라와의 교역으로 후추가 들어왔으며, 설탕도 수입되어 일부계층에서 기호품으로 사용되었다.
고려 후기에 몽고의 지배를 받아 도살법과 여러 가지 육식조리법도 배우게 되어 고려 초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절제했던 식생활에 많은 변화가 왔다. 또 원나라를 통해 찐빵의 일종인 상화(霜花)가 들어오고 술을 증류하는 소주법도 널리 알려지면서 몽고군이 주둔하였던 개성, 안동, 제주 등이 소주의 명산지가 되었다. 이 외에도 포도주, 사탕, 후추 등이 있으며 고려가 원나라에 전해 준 음식으로는 유밀과인 고려만두, 고려병이 있었다.
* 상차림의 기본구조 형성과 조리법의 발전
고려시대에는 곡류, 채소, 과일 등 이용된 식품이 아주 다양했고 조리법과 상차림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상차림의 기본인 밥과 국이 나타나 상차림의 기본구조가 형성되었다. 「고려도경」에 최초로 국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설농탕 외에도 토란국, 아욱, 다시마국, 미역국 등의 이름이 보인다. 콩을 가공한 콩나물과 두부가 이 시기에 이용되기 시작했고 조리기법도 발달하여 기름에 지지거나 튀기는 조리법을 이용하였다.
♣ 조선시대의 식생활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가통치의 근본원리로 삼고 불교를 배척한 사회였기 때문에 유교적 정치윤리에 따라 양반제도를 확립하였고 양반과 서민의 생활을 구별하는 차별제도를 고착시켰다. 또한 4례(四禮)를 존중하는 사상과 조상 봉제사의 의례를 관례로 확립하여 이러한 사상들이 식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농업은 가장 중요한 경제적 토대였다.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것은 백성들의 생활은 물론 국가의 안정에도 필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개간사업을 장려하여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기술을 향상시켜 수확량을 늘리는데 힘썼다. 특히 「농사직설」,「금양잡록」, 「농사집성」 등 농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식생활이 다양해지면서 반가에서 음식을 만드는 조리서 등이 나오게 되었고 명절이나 때에 따른 시식과 절식도 즐기게 되었고 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향토음식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는 우리 식생활문화의 전통이 재정비되는 시기였고 한국음식의 완성기로서 오늘날과 비슷한 한식의 식생활이 이루어졌다.
* 음차의 쇠퇴
조선 왕조의 숭유배불정책으로 불가에서 즐겨 마시던 차는 유교문화 사회에서 점차 사라졌다. 차밭은 방치되었고 전라도 지역의 일부사찰의 스님들이나 귀향살이 중이던 학자들 사이에서만 차 마시는 풍습이 이어졌다. 차가 쇠퇴하는 대신 숭늉을 마시고 화채, 한약재를 달여 만드는 탕차류가 많아졌으며 약주나 탁주, 소주 등 가양주가 발달하였다.
* 상차림의 형식과 식생활규범 정립
고려시대에 비해 이용하는 식품이 더욱 다양해지고 이전 시대의 조리법을 이어받고 다듬어서 상차림의 형식을 확립하였다. 반상은 밥을 주식으로 여기에 어울리는 반찬을 부식으로 구성한 상차림으로 삼국시대 후기 경에 쌀의 증산과 솥의 확대로 상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식과 부식을 분리하고 음식을 처음부터 상위에 전부 차려 나오는 평면전개를 원칙으로 하여 신분이나 경제형편에 따라 3첩, 5첩, 7첩으로 격식화 한 것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이다.
평상시에는 목적에 따라 반상, 죽상, 면상, 교자상, 주안상 등의 형식이 마련되고 특별한 경우에는 의례적인 상차림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 차리는 삼신상부터 혼례상, 회갑상, 젯상 등 엄격한 규범 하에 상을 차리는 관습이 생겼다. 심지어 음식 먹을 때의 기본태도까지 제시하는 등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식생활의 규범이 정립된 시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가부장권 대가족생활과 의례음식
대가족 중심의 가족제도에서 가부장의 조석 상차림은 모두가 외상차림이었다. 장자상속의 가부장권 제도가 강화되어 모든 가정의례는 장자의 가정에서 모여 수행하였다. 따라서 주부는 가문을 위한 행사음식을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의례음식의 규범을 잘 알고 조리솜씨가 숙달되어야 했다.
또한 손님에 대한 접객규범을 존중하여 이를 위한 술과 술안주 음식들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의 음식은 가정의 대를 이어 전수되는 그 가정만의 독특한 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 외래식품 유입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남방으로부터 고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이 전래되었는데 특히 고추의 전래는 우리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고추가 고추가루로 가공이 되면서 김치를 비롯한 각종음식의 조리에 중요한 향신료로 이용되고 고추장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조미료를 탄생시켰다.
이전 시대에서의 김치는 주로 소금, 후추, 천초, 생강 등의 양념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고추가루를 사용하여 매우면서도 복합적인 맛을 가진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구황식품 이용
조선시대는 계급사회로 빈부의 차이가 커 일반 농민들은 자연재해로 흉년이 되면 식량부족에 허덕였고 인위적인 수탈도 심하여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렸다. 조선 중·후기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과 민란 등으로 사회가 혼란하고 농촌이 황폐해져 경작지가 줄어들고 인구도 크게 줄어 서민층의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이에 따라 「구황본초」(救荒本草), 「구황촬요」(救荒撮要 1554), 「산림경제」 등 구황식품에 관련된 서적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구황식품들은 80~90종에 달하는데 산과 들에서 나는 식물의 잎, 줄기, 뿌리, 꽃과 나무열매, 껍질 등 대부분 식물성 식품이었다.
이러한 구황식품들은 대체적으로 죽 형태로 이용이 되었는데 양을 늘릴 수 있고 거친 섬유질을 부드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개화기의 사회환경과 식생활
19세기 말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국가들은 발달된 공업 생산력을 토대로 세계 여러 곳에서 식민지 쟁탈을 위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은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이어 일본이 명치유신을 계기로 개항하였다.
조선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으로 단호하게 대응하였으나 대원군이 물러난 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서양 각국과도 수교를 맺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은 해결되지 못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이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천주교, 실학사상이 들어와 일부 지식인들이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알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는 큰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서양의 선교사들과 이들의 서양식 신교육에 의해 다양한 식품, 조리법 등이 전해지고 외국에 다녀온 외교관들에 의해 서양의 문물과 음식들이 소개되어 서양음식이 조선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궁중에서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처형이던 손탁이 민비와 친교를 맺어 서양요리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일본과 미국의 최초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그의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 에서 서양의 음식에 대해 소개하여 그 시대의 지식인들과 상류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일제시대의 식생활문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추진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전반에 걸쳐 간섭하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 후 국권을 강탈하고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하였다. 일제는 토지, 쌀 등 물적 자원뿐 아니라 인적자원까지 수탈하여 우리나라는 일본의 산업발달에 필요한 원료공급자와 상품시장으로 전락하였다.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약탈당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침략 하에서 춘궁기를 넘기 위해 콩깻묵, 밀기울,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생활을 하여 한국 식생활문화의 침체기였다. 식량의 빈곤은 일제 말엽인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많은 곡물을 공출 당함으로써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구문명의 유입은 계속되었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품제조업체들이 등장하게 되어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과자, 술, 청량음료, 식용유, 각종 통조림 등의 서구식품들이 만들어져 일부 상류층의 식생활에서 이용되었다.
♣ 현대의 식생활문화
일제로부터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사회환경의 급속한 변화는 식생활에 있어서도 과거 어느때 보다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환경에 따라 연대별로 식생활 문화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해방이후부터 1960년대
기아와 극심한 식량부족 상태가 계속되었다. 전쟁과 흉년, 낙후된 농업기술로 인해 해외원조식량에 의존했던 시기이다. 식량의 해외원조를 받으면서 서구식 식생활이 유입되고 미곡의 부족으로 분식장려운동이 전개되어 일반인을 중심으로 밀가루음식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 1970년대부터 80년대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적인 결실로 우리의 경제가 급성장했던 시기로서 경제발전과 더불어 식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식생활로부터 영양가와 맛을 추구하는 풍요로운 식생활로 변화되었다. 주식보다 부식을 강조하고 커피. 가공식품류 등 서구식품의 이용이 증가되어 서양식 식생활문화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전통음식이 경시되는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 1990년대부터 현재
경제성장과 산업화 및 정보화 추세에 따른 소득증대, 핵가족화, 여성의 사회진출, 세계화 등 사회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음식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다. 이 시기는 식생활의 서구화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식품의 소비구조가 서구인들과 비슷해지고 외국의 음식에 대한 기호가 높아지고 있다.
바쁜 현대 생활로 인해 시간과 인력이 덜 소비되는 가공식품이나 편이식품 이용이 늘어나 식품산업, 외식산업이 크게 증가하고 발달하게 되었다.
주부들의 음식담당 전통이 약화되고 이에 따라 전통조리법의 단절, 김치, 장, 젓갈 안 담그기, 손님초대 및 접대문화의 단절, 통과의례 및 관혼상제 등 의례음식의 변질, 가족공동식사 전통의 약화, 음식예절의 상실 등 식생활에서 많은 전통적 요소들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