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충청도 > 충청북도 청원군 |
분류 | 발효음식 > 김치 |
자료보유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문화 류씨 류상현 종가 |
자료기록 | 청원 문화 류씨 류상현 종가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빠금장 | |
2 | 배추김치 | |
3 | 담북장 | |
4 | 감식초 | |
5 | 동치미 | - |
6 | 간장 겉절이 | |
청원 문화 류씨 종가의 내림 손맛을 이어가고 있는 김종희 종부는 아나운서 출신으로 단아한 외모와 나긋한 말솜씨가 인상적이다. 친정에서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던 그는 직장 생활 중 만난 남편이 장남이라는 것만 알고 덜컥 시집을 왔다. 종부의 삶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녀지만, 며느리 사랑이 남달랐던 시부모님 덕분에 어려운 줄 모르고 종가의 살림을 떠맡았다. 잘 모르니 무작정 최선을 다했고, 그런 며느리가 시부모님 눈에는 마냥 예뻐 보였던 것이다.
종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남편 류상현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끔 시아버지는 “종손은 천벌을 받고 태어났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만큼 책임이 무겁고 어려운 자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남편은 어릴 때부터 제사 지내는 일을 즐거워할 만큼 종손의 역할에 충실했다.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언젠가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확고한 모습 때문에 김종희 종부도 자신의 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편안한 도시의 삶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무조건 몸을 써야 하는 시골 생활은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풀을 뽑느라 허리가 시큰해도 비 한번 내리면 금세 풀이 훌쩍 자라는 게 무심한 자연의 섭리였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하루 즐겁고 사흘 운다.”고 고백했을 만큼 그녀의 시골 생활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무성했던 잡초가 어느새 정돈이 되고, 정성껏 빚은 메주가 예쁘게 띄워진 것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고 한다. 정성과 마음을 다하니 작으나마 보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담근 장을 맛본 사람들이 “이런 장을 먹을 수 있어 행운이다.”라고 말했을 때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고 한다. 그런 보람이 그녀의 가장 큰 에너지가 되고 있다.
김종희 종부는 지금도 시어머니 홍순정에게서 배운 방식 그대로 장을 담근다. 만드는 과정에서 전통의 방식과 멀어지면 자연스레 그 맛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기가 나쁘고 먼지가 많다고 자연을 차단시키면 그 맛을 제대로 내기 어렵다. 옛 조상들은 장맛을 내는 데 햇볕, 바람, 공기 등 자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겨 장독대를 집 바깥에 둔 것이다.
김종희 종부는 이처럼 종가의 장맛을 지키는 일이 가풍을 지키는 일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옛 어르신들은 장맛이 그 집안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고, 장을 어떻게 담그느냐에 가문의 철학이 반영되곤 했다. 그 때문에 종가의 내림 손맛을 이어가는 것은 종가를 보존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종희 종부의 아들은 현재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한다. 틈틈이 어머니를 도와 종가 음식들을 마련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종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점차 사라져 가는 종가의 맛을 현대에 되살리는 일도 가문을 지키는 일이기에 이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기는 종부이다. 더불어 그녀도 종가의 내림 음식들을 오롯이 되살리는 역할에 더욱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한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황해도 유주(儒州), 즉 황해도 신천군 문화(文化)면의 호족인 류차달이 왕건(877년~943년)의 고려 개국을 도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대승(大丞)이 되고 삼한공신(三韓功臣,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당대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에 봉해졌는데, 류차달이 이 청원 문화 류씨의 시조이다.
고려가 망하면서 청원 문화 류씨 시랑공파 11대 류당의 손자들이 지금의 청원군 남이면과 옥천으로 은거, 일대에 류씨 일가가 무리 지어 살기 시작했다. 현재 류상현 종손과 김종희 종부가 지키고 있는 청원 문화 류씨 종택은 규모는 소박하지만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고 옛 전통을 아끼며 살아가는 종가의 기품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공간이다.
청원 문화 류씨 종가의 앞마당과 뒷마당에는 전통 방식의 장독대가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장독대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에서 필수적인 공간 중의 하나로, 주로 햇볕이 잘 드는 동편에 마련한다.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어 바닥을 평평하게 다진 후 독의 크기에 따라 배열하는데, 종가에는 수십 개의 독이 있어 살림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김종희 종부는 항아리 뚜껑 위에 묵은 햇수를 조약돌로 표시해 두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맛과 향이 적당한 장류를 꺼내어 사용한다.
장독대 한편에는 세 개의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솟대는 몇 해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본래 솟대는 마을 입구에 세워 나쁜 액을 막아 주는 역할과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런 솟대의 ‘액을 막는다’는 의미와 멋을 살려 장독대에 세웠다고 한다.
청원 문화 류씨 종가에는 콩을 삶던 가마솥과 콩을 빻던 나무절구, 콩을 갈던 맷돌 등 장을 담글 때 사용하던 옛 조리 기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나무절구는 지금도 종부가 다양하게 활용하는 전통 조리 기구다. 음식을 만들 때 불을 피우고 조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청원 문화 류씨 종가에는 숯불을 담아 놓던 화로와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풀무가 그대로 전해진다. 화로는 계층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어느 가정에서나 두루 쓰였던 살림살이로, 과거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기도 했다. 풀무는 손잡이를 돌리면 압축된 공기가 화덕으로 들어가 불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청원 문화 류씨 종가에는 손때 묻은 되와 말이 전해진다. 되는 곡식이나 가루, 액체 따위를 담아 분량을 헤아리는 데 사용했던 그릇으로 주로 사각형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다. 말은 열 되가 담기도록 계량된 원기둥 모양으로, 주로 곡식이나 가루의 부피를 잴 때 쓴다. 한 말은 오늘날의 약 18L에 해당한다. 함지박은 통나무의 속을 파서 그릇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일명 ‘함박’이라고도 한다. 주로 떡가루를 버무리거나 반죽할 때, 또는 김칫소나 깍두기를 버무릴 때 등 전통 조리 과정에 두루 사용된다. 무겁고 튼튼한 것은 대를 물리면서 사용하는데, 청원 문화 류씨 종가에서는 시어머니가 사용하던 함지박이 그대로 전해진다. 손때 묻고 한쪽 귀퉁이가 깨져서 더 이상 사용이 어렵지만 시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물건이라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