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충청도 > 대전광역시 |
분류 | 발효음식 > 김치 |
자료보유 | 대전광역시 동춘당 |
자료기록 | 대전 은진 송씨 송준길 종가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동치미 | |
2 | 배추김치 | |
3 | 나박김치 | |
4 | 깍두기 | |
5 | 맛된장 | |
6 | 찹쌀인절미고추장 | |
7 | 배추장아찌 | |
8 | 오이소박이 | - |
9 | 간장 | |
10 | 황석어젓 | |
김정순 종부는 논산군 연산이 친정으로 22세에 이 종가로 시집을 오면서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안주인이 되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이 국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미각이 뛰어난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재빠른 손놀림과 시어머니의 내림 솜씨를 물려받았는데, 친정과 시댁의 음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종가의 부엌살림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흔히 종부라 하면 손마디 고운 종가의 안주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을 그렇지 못하다. 손님이 많으면 하인들의 손을 빌릴 수 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의 종부는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순 종부가 실고추를 썰어내는 솜씨만 봐도 부엌에서 보낸 세월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종부의 할아버지 김석중은 손녀의 혼담이 오가던 시절, 먼저 들어온 두 종가의 혼사를 마다하고 제일 늦게 연락이 닿은 대전 은진 송씨 종가와의 인연에 “이제 진짜 혼인할 자리가 나왔다. 진짜 양반이 나왔다.”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대전 은진 송씨 종가는 종가 중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김정순 종부에 따르면 시어머니 김경순은 늘 차분하게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자상한 시아버지 송용우는 외출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깨를 빻는 작은 절구를 사다 몰래 건네줄 만큼 며느리 사랑이 남달랐다. 종가의 어른들도 남의 집 식구 데려다 잘 대하지 못하면 그 집이 망하는 법이라며 종부를 소중히 여기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 세월이 변하여 무거운 책임만 남은 것이 종부의 삶이 되었지만, 김정순 종부는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라며 고생스러웠던 기억에는 말을 아낀다.
김정순 종부는 지금도 손에서 부엌살림을 놓지 않는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자꾸 만들어 보며 종가의 음식 맛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음식을 배워 보고 싶다면 아낌없이 가르쳐 줄 생각이다. 누구의 손을 통해서든 종가의 음식이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고명딸로 자란 송정원은 종부인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고생스러운 모습만 생각난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도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지금은 옆에서 어머니를 살뜰하게 챙기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그녀는 어머니인 김정순 종부가 타고난 미각과 음식을 대하는 남다른 정성, 오랜 세월 경험으로 쌓인 칼솜씨가 어우러져 특별한 손맛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학창 시절에도 도시락에 배추김치와 깍두기만 담아 가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을 만큼 어머니의 손맛은 누구나 알아주었다. 종가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접했던 맛과 문화를 다음 세대에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요즘 그녀는 어머니의 손맛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녀는 1학년 때부터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등 전국의 종가들을 답사하고 공부할 만큼 종가 문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눈썰미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1980년대 동춘당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종갓집들이 모여 살던 내림 문화가 모두 흩어져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또 옛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부정적인 면만을 꼬집는 방송이나 매체를 접할 때면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낡고 오래된 것이라고 무조건 버릴 게 아니라, 그 속에서 김장과 같은 공동체 문화와 품앗이 같은 나눔의 문화를 읽어내고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사당 남쪽에 자리한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그만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현판은 우암 송시열(1607년~1689년)의 글씨다. 우암은 동춘당 송준길(1606년~1672년)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공부했던 사이로, 당대 사람들에게 ‘양송(兩宋)’으로 불릴 만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각별한 우의를 나누었다. 동춘당은 나직한 기단과 담박한 모양새가 조선 후기 별당 건축의 표본이라 할 만해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동춘당 뒤편에는 'ㅡ'자 사랑채와 'ㄷ'자 안채, 두 개의 사당으로 이뤄진 송준길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인조 20년(1642년)에 세워진 이 고택은 처음 세워졌을 때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랑채 뒤편과 안마당 사이에 야트막한 내외담을 두어 서로의 공간을 독립시켜 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낡은 기왓장 사이로는 와송이 가득 자라 종가의 오랜 역사를 대변한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는 국불천위(國不遷位) 종가로 이름이 높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뜻한다. 보통 종가라 하면 10대(代) 이상의 조상을 모시고 장손으로만 이어져 내려온 큰집을 의미하지만, 불천위 조상을 모신 명문 종가의 경우 ‘불천위 종가’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사당은 불천위 조상인 동춘당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평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할 만큼 신성한 공간으로 여긴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장가, 또한 유력한 정치가였던 동춘당을 조상으로 모신 종가 중의 종가임을 상징하는 곳이라 하겠다. 그 때문에 종부는 사당에 제를 지내기 보름 전부터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궂은일 등은 일절 금하며 몸가짐을 정갈히 하였다. 또한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을 장만할 때도 더욱 깨끗이 씻고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다.
찬방은 찬마루로도 불리는데, 부엌 옆에 붙어 간단한 반찬을 만들거나 조리된 음식을 소반 위에 차려 안방과 사랑방 등으로 내가는 공간이다. 그 때문에 평소 상차림에 필요한 식기류나 소반, 뒤주 등을 보관하는 다용도실의 역할을 겸한다. 이러한 찬방은 주로 손님맞이가 잦은 반가나 중 · 상류층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데,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대형 찬방은 그 크기로 미루어 종가의 부엌살림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사당으로 향하는 길목과 안채 뒤편에는 무려 4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종가의 텃밭이 자리하고 있다. 김정순 종부는 이곳에서 대부분의 식재료를 얻는데, 그중에서도 잎이 가늘고 길이가 짧은 토종 부추는 부드럽고 그 맛과 향이 탁월해 다양한 음식에 활용된다. 종가에서는 부추를 또 다른 말로 ‘정구지’라 부른다.
종부는 요즘 식재료보다 예전의 식재료가 맛이 더 좋았다고 한다. 옛 고추는 훨씬 얇고 부드러워 실고추를 만들어 먹기 좋았고, 햇볕에 말리면 빨갛게 고운 빛이 났다. 또한 조선배추는 매우 달고 연하며, 무는 생채를 해도 즙이 많고 사각사각했다고 한다.
차가 없던 시절, 10리 거리에 있는 방앗간에 다녀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의 종손들은 인절미고추장을 만들 때 떡메 치는 일부터 절구에 콩을 빻는 일, 장보기까지 힘이 드는 일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도왔다. 맷돌은 곡식을 넣어 가루를 만들거나, 콩이나 녹두 등을 물과 함께 갈아서 콩물 등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맷돌은 곡물을 넣는 구멍이 있는 위짝과 갈린 곡물이 몸체 밖으로 흐를 수 있도록 홈이 파진 밑짝이 서로 맞닿아 손잡이를 돌리면서 사용하는 형태이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에서는 방아나 절구로 찧어낸 곡류를 키에 담아 까불러서 겨나 지푸라기 같은 가벼운 불순물은 날리고 돌이나 모래 같은 무거운 불순물은 키 안쪽에 남게 하여 알곡을 분류했다. 가마솥은 보통 밥을 짓거나 콩을 삶는 용도로 사용한다. 대전 은진 송씨 종가에서는 큰 고무통이나 양푼이 없던 시절, 많은 양의 깍두기를 담글 때 가마솥에 넣고 주걱으로 저어 주었다. 그러면 고춧가루 양념이 골고루 배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