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강원도 > 강원도 강릉시 |
분류 | 발효음식 > 장(醬).젓갈 |
자료보유 | 강원도 강릉시 서지초가뜰 |
자료기록 | 강릉 창녕 조씨 조옥현 종가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무장아찌 | |
2 | 풋고추장아찌 | |
3 | 쪼고리김치 | |
4 | 오징어지 | |
5 | 부새우젓 | |
6 | 뽁작장 | |
7 | 참지누아리장아찌 | |
8 | 창란젓 | |
9 | 고춧잎장아찌 | |
10 | 돗나물 물김치 | |
11 | 포식해 | |
12 | 오징어지 | |
13 | 명란곤지젓 | |
14 | 소식해 | - |
15 | 마늘잎장아찌 | |
16 | 서거리지 | |
최영간 종부는 시어머니인 김상기 노종부를 모시며 종가의 안살림을 맡고 있다. 종부 역시 강릉 최씨의 명문가에서 시집왔다. 김쌍기 노종부는 연로한 탓에 며느리에게 안살림을 내주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손님들을 맞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정정하다. 그는 최영간 종부가 시집와서 맞은 첫 생일 아침, 직접 밥상을 차려 내고는 “이렇게 일이 많고 어려운 게 종부의 길인데 내 뒤를 이어 준다니 고맙고 든든하다. 많이 먹고 나와 같이 살아다오.”라고 따뜻한 정을 건넸다. 녹록하지 않은 종부의 삶을 살아온 선배로서 언제나 다정한 말 한마디, 살뜰한 손길 한번으로 며느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책을 엮어낼 만큼 남다른 글솜씨를 자랑하는 최영간 종부지만 그 부지런함은 시어머니를 따라잡기 어렵다. 그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후 외롭고 적적한 마음을 매일 일기로 썼는데 그 양이 노트 수십 권에 달한다. 그중에는 종가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며느리에게 물려준 종가의 살림을 지켜보는 노종부의 마음을 담은 글도 있다. 역시 평생 여재(如在)의 삶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강릉 창녕 조씨 종가의 종부다운 모습이다.
강릉 창녕 조씨 종가를 지키고 있는 최영간 종부는 시집오기 전까지 종부의 삶은 감히 상상조차 못 했다. 친정에서 직접 밥을 지어 먹어본 적도 없을 만큼 귀하게 자랐으니 어리고 철없는 새댁이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하루는 아흔이 넘은 시조부님 조인환이 방으로 부르셨다. 지엄하신 부름에 잔뜩 긴장을 하고 찾아뵈었는데 온화한 미소로 맞아 주시며 제사 때만 쓰던 달짝지근한 곶감까지 내놓으셨다. 그러고는 방에 걸린 액자 두 개를 가리키셨다. ‘여재(如在)’와 ‘경농(經農)’. 시조부님의 따뜻한 가르침에 멋모르던 손자며느리는 가슴 한쪽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여재(如在)라 함은 항상 같은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네 어미가 널 보는 얼굴, 즉 어미가 자식을 보는 얼굴이 여(如)이니라.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모습. 넌 그 모습을 지켜야 하느니라. 그리고 경농(經農)은 농사를 경영한다는 뜻이니라. 너는 이제 서지 사람이다. 농사는 인생과 같으니, 농사의 법도를 익혀야 한다.” 시조부님의 말에 담긴 묵직한 무게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날부터 최영간 종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종가의 살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 년 중 종가가 가장 바쁜 때인 모내기 철에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부엌살림을 도우며 눈치껏 요리를 익혔다. 한결같이 안살림을 챙기는 시어머니에게서 여재를 배우고, 못밥 한 그릇도 소중히 받아 들던 일꾼들에게서 경농을 가늠했다. 땅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흙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읽었다. 잊혀 가는 지역과 종가의 전통 상차림을 널리 알리겠다며 시작한 서지초가뜰은 종부의 지난 삶을 음식 하나로 집약한 공간이다.
직접 농사지은 쌀밥을 기본으로 우리 땅에서 제철에 나는 먹거리들로 푸짐하게 채운 밥상은 그야말로 '흙이 보내준 밥상'이다. 흙은 어머니의 마음이니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반찬 하나하나 가득 담겨 있다. 최영간 종부는 이처럼 시조부님과 시어머니께 배운 종가의 가르침을 음식을 통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종부의 또 다른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강릉 창녕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장녀인 선덕여왕과 혼인한 창성부원군 조계룡이다. 조선 중기에 그 후손들 중 일부가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에 머물면서 지금의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강릉 서지골(지금의 난곡동)에 자리한 창녕 조씨 조옥현 종가는 조선 말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드넓은 논밭에 둘러싸여 있다. 이 종가는 강릉시가 지정한 전통한식점 1호인 ‘서지초가뜰’을 운영하며, 모내기 때 일꾼들에게 냈던 ‘못밥’과 농한기에 이웃들과 화합의 장으로서 나눠 먹었던 ‘질상’ 등을 복원해 선보이고 있다.
강릉 창녕 조씨 종가가 자리한 서지골은 그 이름에 쥐가 곡식을 모아서 보관할 만큼 상서로운 땅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종가는 대대로 곡식이 풍부했다. 최영간 종부는 일꾼들이 사용하던 농막을 음식점으로 고치면서 서지골의 작은 초가란 의미에서 ‘서지초가뜰’이라 이름 붙였다.
강릉 창녕 조씨 종가 앞에 펼쳐진 드넓은 논밭은 모두 종가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다. 모내기부터 수확 때까지 물을 빼지 않고 벼를 키우고, 수확 후에는 거꾸로 매달아 따스한 가을볕에 자연 건조시킨다. 그렇게 하면 좋은 영양분이 모두 볍씨로 가게 된다는 최영간 종부의 설명이다. 번거롭고 일손도 많이 필요한 일이지만 무릇 맛있는 밥상은 잘 키운 쌀 한 톨에서 시작된다는 게 이곳 종가에서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새댁 시절, 시조부님 조인환은 최영간 종부를 불러다 앉혀 놓고는 경농을 강조하셨다. 농사에도 법도가 있으니 여자라 할지라도 이를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꾼들에게 내는 못밥(모내기 밥)과 질상(질먹는 날 내는 상) 한 그릇에도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았다. 뜨거운 봄볕에 허리를 숙이고 장시간 일했으니 미역국처럼 혈액순환을 돕고 소화가 편한 음식들로 못밥을 차려 냈다.
또 하나의 가르침은 여재, 즉 한결같음이다. 시조부님은 여재를 어머니의 얼굴에 비유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할지라도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얼굴만큼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업 기술이 발달해 얼마든지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쌀은 옛 방식 그대로 농사짓는다. 세월이 변해도 밥상의 기본은 한결같아야 한다는 여재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결과다.
강릉 창녕 조씨 종가 뒤편에는 원형 그대로 간직된 김치움이 자리하고 있다. 김치움이란 땅에 김칫독을 묻고 그 위에 가는 통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운 다음 짚을 덮어 작은 움집을 만든 것으로 일종의 김치광이라 하겠다. 이렇게 김치움을 세우면 눈과 비를 피하고 땅속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김치의 숙성과 장기 보존을 돕는다. 김치움 뒤편으로는 푸른 대나무가 무성한데, 이 또한 겨우내 일정한 온도 유지를 위한 선조들의 지혜였다.
강릉 창녕 조씨 종가의 최영간 종부는 예부터 사용하였던 생활 도구와 가구 등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 물품들에 각각 번호와 이름을 붙여 유물의 쓰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였다. 옛것이 고인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밑거름이라 생각하는 최영간 종부는 앞으로 자신이 모아 두었던 유물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등의 다양한 문화 사업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