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인들의 인사는 일반적으로 “사왓디캅”(안녕하세요)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시골에 가면 종종 “낀 카오 래오캅”, “탄 카오 래오캅”(식사하셨습니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사는 한국에서도 특히 식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으로, 태국에서 그만큼 먹는 것을 중시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후자의 인사에서 “카오”(khao)는 ‘쌀’을 뜻하는데, 이것은 타이인들의 음식문화에서 쌀이 차지하고 있는 절대적인 위치를 암시한다.
13세기말 작성된 것 으로 추측되는 수코타이(Sukhothai) 왕조(1238-1438) 시대 람캄행(Ramkhamhaeng) 왕(재위 1279-1298)의 비문은 당시 타이 사회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물에는 물고기가 있고, 논에는 벼가 자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Krom Sinlapakon, 1976: 76).
쌀에 대한 타이인들의 전통적 인식과 태국의 전통적 음식문화에서 쌀과 생선이 지니는 의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태국의 전통적 음식문화란 밑에서 보게될 것처럼 어디까지나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쌀과 생선이 타이인들의 기본음식이라는 사실은 17세기 태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의 여행보고서에도 나타난다. 예컨대 1630년대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아유타야(Ayutthaya) 商館長이 었던 예레미아스 반 블릿은 타이인들이 일상음식으로 대개 밥, 생선 그리고 약간의 야채를 먹는다고 쓰고 있다.
소스로는 새우, 게, 홍합, 생선을 후추, 소금과 함께 섞어 만든 “블라 잔”(bladsjan)과 생선소스 및 후추소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Van Vliet, 1638: 83)1).
제르베즈 신부는 태국 서민들의 식단이 밥과 약간의 과일 그리고 햇볕에 말린 생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고하는데, 이와 비슷한 서술은 1687-1688년 태국을 방문한 프랑스 사신 시몽 드라 루베르의 여행기에서도 발견된다.
제르베즈에 의하면, 당시 태국에는 닭과 오리가 비싸지 않았고, 달걀도 싼 식품에 속했다. 또한 돼지와 염소도 비교적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고기였다 (Gervaise, 1688: 87; La Loubère, 1691: 35).
당시 이처럼 고기가 풍부했던 것은 제르베즈 신부가 주로 활동한 수도 아유타야와 그 일대에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베트남인, 말레이인,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등 많은 외국인 집단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외국인 집단들 중에는 중국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말레이인, 포르투갈인들과 같이 태국에 정착하여 사는 자들도 많았는데, 타이 사회는 이들과의 긴밀한 접촉으로 이런 나라들의 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680년대 중엽 태국을 방문한 페르시아인 이브라힘 이븐 술라이만의 여행보고서에 의하면, 1656-1688 년간 태국의 왕이었던 나라이(Narai)가 왕자였을 때 종종 페르시아인들의 집에 찾아가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Ibrahim, 1688: 94).
1680년대에는 아유타야 궁정의 한 유럽인 관료의 아내가 태국의 과자요리에 처음으로 계란을 도입하여 과자요리의 ‘혁명’을 이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미대륙이 원산지인 토마토도 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포르투갈인들을 통해서였다 (Thai Life, October 1981: 45; Hutton, 1996: 9-15).
반 블릿도 “블라잔”이라는 소스를 소개하고 있지만, ‘까삐’와 이를 바탕으로 한 ‘남프릭’ 등 타이인들의 전통적인 수산물소스에 관한 최초의 가장 상세한 기록은 제르베즈 신부의 여행기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타이인들이 “썩은 새우”로 만드는 까삐(kapi)를 모든 요리에 섞어 맛을 낸다고 말한다. 캄보디아의 쁘라혹과 베트남의 느억맘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魚醬인 까삐는 실은 보리새우나 참새우와 같이 작은 새우를 발효시킨 것으로 20세기초에 발전 된 맑은 생선간장인 남쁠라(nam pla)와 함께 태국의 魚醬문화를 형성한다.
제르베즈에 의하면, 타이인들은 이 까삐를 소금, 후추, 생강, 계피, 정향, 마늘, 양파, 육두구, 그리고 여러 가지 허브와 함께 섞어 소스를 만들었는데, 타이어로 남프릭(nam phrik)이라고 부르는 이 소스는 특히 고기 요리에 풍미를 더하여 입맛을 돋구었다고 한다 (Gervaise, 1688: 88).
19세기 중엽 영국의 사신으로 방콕을 방문한 존 보우링도 남프릭에 주목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 한다.
보우링의 서술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된다. 즉 오늘날 남프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칠레고추가 17세기 제르베즈의 기록에서는 없었지만 19세기 중엽에는 이미 남프릭의 고정 요소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7세기경에는 타이 사회에 분명히 도입되어 있었을 것이나 아직 그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칠레고추가 그 후 어떤 시점부터는 남프릭의 주재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스 가운데 하나인 카레는 인도인들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이미 17세기 유럽인들의 여행기에서 그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제르베즈는 카레를 타이인들이 숟가락으로 떠서 밥에 얹어 먹는 소스라고 묘사한다 (Gervaise, 1688: 88).
19세기경 카레는 태국에서 이미 보편적인 음식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보우링이 “시암인들은 그들의 일상식품 중의 하나인 카레를 상당히 많이 만든다. 카레는 일반적으로 아주 매워 유럽인의 혀가 탈 정도다”라고 보고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Bowring, 1857: 108).
오늘날 타이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점심메뉴중의 하나인 쌀국수는 중국인 특히 廣東人들의 음식으로 중국인들이 상당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아유타야 시대(1351-1767), 특히 17세기-18세기 중엽에 이미 타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음식이 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쌀국수가 칠레고추가 반드시 들어가는 남프릭과 고수풀 등의 허브를 첨가한 “타이음식”으로 발전한 것은 방콕 왕조 시대(1782-1932) 특히 19세기 이후부터라고 보여진다 (Hutton, 1996: 15). 태국의 밥은 크게 북부 및 북동부 지역의 찹쌀밥과 중부 지역의 멥쌀밥으로 나뉜다.
찹쌀 밥은 밑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자포니카(japonica) 계통의 쌀로 지은 밥이다. 중부 지역 사람들은 인디카(indica) 계통의 쌀로 밥을 짓는데, 그 방식은 1850년대 보우링의 보고에 의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우선 쌀을 너더댓 번 씻어서 냄비나 솥에 담가 물을 넉넉하게 붓는다. 약 3분 끓인 다음 그 물을 따라버리고 이제는 연한 불에 얹어 쌀이 타지 않고 충분히 찌도록 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밥의 향미가 보존되고 쌀알들이 서로 붙지 않아 손으로 밥을 먹을 때 손가락이 끈적거리지 않게 된다 (Bowring, 1857: 111). 이 방식은 ‘훙 카오’(hung khao)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끝으로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타이인들의 전통적인 식사방식을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외래문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19세기 전반 태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 팔르그와의 기록에 따르면, 타이인들은 돗자리나 양탄자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Pallegoix, 1854: 217).
이것은 중국의 식탁문화를 받아들인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시골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먹는 방식도 태국의 토착적인 방식은, 19세기말에 태국을 여행한 어니스트 영의 보고에 의하면, 동남아 대부분의 다른 지역 에서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음식을 뭉쳐 입안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제르베즈가 타이인들이 카레소스를 떠서 먹을 때는 숟가락을 사용한다는 기록에서처럼 숟가락도 이미 도입되어 있었다. 영은 타이인들이 유럽인들을 모방하여 숟가락을 쓰기도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전래경로는 알 길이 없다.
영은 또한 타이인들이 중국인들의 방식에 따라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기도 한다고 말한다 (Young, 1898: 110). 타이인들의 젓가락 사용은 중국과 각별한 역사적인 관계에 있었던 베트남 사람들을 제외하면 동남아에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점과 관련하여 타이인들의 강한 문화적 수용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