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궁중의 잔치
궁의 잔치는 규모나 의식 절차에 따라 진풍정(進豊呈),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으로 부른다.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3~5일에 걸쳐 밤낮으로 여러 차례 열리며, 잔치의 종류에 따라 주최하는 이와 손님들이 달라지고 그 규모도 차이가 난다.
잔치는 참여하는 사람에 따라 외연과 내연으로 나뉜다. 외연은 실질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군신이 주축이 되어 왕을 주빈으로 모시고 여는 잔치이고, 내연은 왕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며 세자빈이나 봉호를 가진 여성이 주측이 되는 연향이므로 왕실 친인척이 참여하기도 하었다.
궁중의 잔치는 왕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왕비.대비 등의 회갑.탄일.사순.오순.망오(41세).망육(51세) 등 특별한 날, 또는 왕이 존호를 받거나, 기로소에 들어가는 날, 왕세자 책봉, 가례, 외국 사신 영접 등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에만 열었다.
왕실의 잔치는 그 기쁨을 백성과 함께 나누어야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으므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어려운 형편에 놓이면 왕실에 경축할 만한 일이 있어도 연향을 오랫동안 연기하거나 아예 베풀지 않기도 했다. 현종 대(1659~1674)에는 흉년으로 한 차례도 연향을 베풀지 않았다.
숙종 즉위 30년이 되던 1703년에도 축하 행사 논의가 있었으나 ‘흉년으로 백성이 곤궁하니 금년 뿐 아니라 명년도 불가하다.’라는 견해가 대두되어 논의가 수그러들었다.
1705년에 다시 세자와 제신들이 간곡히 청하여 4월에 진연을 베풀기로 하였는데, 기상이변 등의 이유로 두번이나 연기한 후 결국 1706년 8월에나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처럼 연회를 열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신하들이 잔치를 베풀기를 청하는데, 왕은 국가의 재정.궁궐의 분위기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양하며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하들이 계속 청하면 마지못헤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그 규모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왕의 허가가 떨어지면 잔치를 열기로 한 날로부터 수개월 전에 준비하기 시작한다.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그 책임을 맡는 관원을 공직자 중 선정하여 임시로 겸직 발령하고 연회 당일의 의식 순서, 무용, 노래, 음식 등의 절차와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특히 음식은 연회에 맞는 상차림의 크기 및 음식의 수와 내용올 정하고 찬품단자 또는 음식발기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잔치 음식의 종류와 필요한 식품의 분량 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 연회 음식의 꽃, 신선로
궁중의 잔치 기록인『진연의궤(進宴儀軌)』의 찬품에는 신선로의 재료로 소 안심고기, 곤자소니(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가 많은 부분), 간천엽, 돼지고기, 돼지 새끼, 꿩, 묵은닭, 전복, 해삼, 숭어, 달걀, 표고버섯, 미나리, 무, 녹말, 밀가루, 파, 참기름, 간장, 후추, 잣, 은행, 호두 등 무려 25종류의 식재료를 열거하고 있다.
신선로에는 채소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고기와 생선이 사용되어 매우 화려하였다. 신선로의 모양과 조리법이 처음으로 기록된 문헌은 숙종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이 쓴「소문사설(謏聞事說)」, (1740)이다.
이 책에는 ‘열구자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옛 조리 문헌인 「규합총서」, 「임원심육지」,「규곤요람」,「동국세시기」 등에는 신선로에 들어가는 재료와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신선로는 점차 조선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근대 시기 요리옥의 상차림 가운데 빠질 수 없는 화려한 음식으로 여겨 졌다. 20세기 초중반에 발간된 요리책의 표시에도 신선로 그림이 많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