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기원은 수렵․채취시대의 과실주가 최초의 술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잘 익어 당분을 함유한 과실이 땅에 떨어져 상처가 나거나 과육과 공기 중의 야생효모가 자연적으로 접종되어 증식과 함께 당을 분해하는 과정, 곧 발효를 거치게 되면, 이 과정에서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 곧, 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뭇가지의 갈라 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팬 곳에 원숭이가 저장해 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이한숙 2011)을 처음으로 맛 본 원시인들은 시큼하고 톡 쏘는 오묘한 맛과 묘한 쾌감이 가져다주는 마력에 빠져들었다는 원주(猿酒)전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전해오고 있다(원경은과 임완혁 2010).
그 후부터 인간들이 직접 술을 빚어 마시게 되었으며, 수렵․채취시대에는 과실주,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술, 농경시대에는 곡주를 만들었으며, 차츰 양조기술의 발달과 함께 알코올 농도가 높은 위스키․브랜디 같은 증류주를 만들게 된다.
세계 각국의 고대 문헌에는 술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신화 속에 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세 딸을 웅심연으로 초대해서 술을 대접하게 되며, 이때 유화와 부부의 연을 맺어 주몽을 낳고, 후에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우리 술의 역사적 특징을 살펴보면, 전통술의 태동기인 삼국시대에는 곡물을 사용해 술을 빚는 방법이 고구려에서 완성되어 주변국으로 전파되었다. 전통주의 성장발전기인 고려시대는 탁주, 약주, 소주의 기본 형태가 완성되어 다양한 술이 개발되었다.
궁중에서는 양조 전담부서인 양온서(釀醞暑)를 두고 어주(御酒)와 국가 의식용 술 을 빚었고, 일반에서는 사원에서 제조한 누룩과 술을 파는 등 상품화가 이루어졌으며 몽고와 원의 영향으로 증류주가 유입된다.
전통주의 최고 전성기였던 조선시대는 원료미가 멥쌀위주에서 찹쌀로 고급화되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가문의 술과 지방주가 성행을 하였으며, 술 관련한 기록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박록담 2005).
일제강점기를 맞아 1907년 주세법의 강제시행과 더불어 650여종에 이르던 가양주형태의 우리 술은 사라지고 양조장 형태의 대량생산과 획일적 생산체제를 갖추게 된다.
또 일제의 주세정책이 정부의 주세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주류산업의 진흥보다는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에 머물러 오랜기간 우리 술은 치명적인 쇠퇴기와 표류기를 겪게 된다. 그 후 80년대에 들어와 경제개발의 성과와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새롭게 싹을 틔워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전통주가 쇠퇴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1917년 자가 양조 전면 금지와 1965년 양곡관리법의 등장이 큰 원인이었다.술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하므로 막걸리 원료가 쌀이 아닌 밀가루로 대체되고, 증류식소주를 대신해서 희석식소주가 생산되면서 품질저하가 이루어졌다.
’87년 맥주의 소비량이 사상 최초로 막걸리 소비량을 넘어섰고, 올림픽을 계기로 양주 소비가 급증하다가 요즘은 건강과 복고적인 성향으로 전통주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적인 소비 확대 추세인 웰빙트랜드에 편승하여 우리의 전통주에 대해 재인식하고 다방면의 노력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