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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3. 한식의 특성과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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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한식의 형성과 변천과정

한국인의 식생활 역사는 한반도에 우리 민족이 정착한 구석기시대로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곡류로 지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기타의 식품들을 반찬으로 하는 주·부식형의 식사 형태가 태동된 것은 신석기 후기경 농경이 시작되면서였다.

농경이 정착되면서 가축을 길러 식용에 쓰게 되었고, 어로 기술의 발달에 따라 식용 어패류의 종류도 증가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농경의 발달과 함께 여러 가지 소채류의 재배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곡물, 어물, 수조육류, 채소류, 과실, 장류, 술, 포, 염, 기름, 꿀 등의 기본 식품을 일단 구비하였다. 따라서 곡물로 밥을 지어 주식으로 하고 기타 식품들을 부식(饌)으로 하는 식사 유형이 고려 후기에 일단 정립된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서 이를 토대로 한 식생활의 전통정비기를 맞게 되는데, 조선 전기는 한식의 발달 시기로, 조선 후기를 한식이 완성되는 시기로 본다(강인희, 1980). 이상이 우리 식생활사 구분에 대한 일반적 견해이다.

즉, 조선시대는 우리 식생활의 전통이 비로소 정비되어 음식문화의 꽃을 피우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 그 후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근대화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현대 식생활문화를 이루게 된다.

1) 고대의 식생활

(1) 한국인의 밥문화

한국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밥을 주식(主食)으로 하고, 그 외의 국이나 반찬들을 부식(副食)으로 하는 주·부식형의 식사 관습이 정확한 답이다. 그런데 이때 밥이라고 해서 쌀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기장이나 조, 보리 같은 곡식 전체를 밥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거 일반 서민들이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일 년에 두세 번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를 보더라도 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한반도 북쪽에 사는 서민들은 주로 조나 기장을 먹었고, 남부의 서민층은 보리를 먹었다. 남부의 귀족층 정도만이 쌀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패턴으로 곡물의 식용분포가 이루어졌다(이성우, 1992).

(2) 한국 곡식농사의 역사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대체로 서력 기원전 10~15세기까지 올려 잡는 것이 보통이다. 1976년 경기도 여주에서 이 시기에 먹었던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최 준식·정혜경, 2004). 그리고 2003년에는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13000년 전의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쌀만 발견된 것은 아니고 조나 겉보리가 탄화된 것도 발견되었다. 이 쌀은 추정컨대 인도 갠지스 강 하류에서 비롯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먹는 쌀은 학명으로 ‘자포니카’라고 불린다.

우리의 식생활 패턴이 주·부식으로 나뉘는 것은 이 벼를 재배한 다음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벼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다른 곡물들이 들어와 있었다. 기장과 조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그 다음에 보리, 그리고 벼가 들어오게 된다.

그 다음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식습관을 결정해버렸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콩이다. 이 콩때문에 한국의 장(醬)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한국인에게 밥이란 많은 의미가 있다.

가령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말한 것처럼 ‘밥이 하늘(한울님)이다’라는 주장에서 과거에 우리가 밥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밥이 보약이다’라는 믿음도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다.

남아시아나 동남북아시아 사람들의 주식이 쌀인 것을 보면 오늘날 쌀은 가장 많은 인류가 먹는 음식이다. 쌀은 별다른 가공 없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인 반면 서양의 주식인 빵은 밀가루로 만들어 이스트 같은 팽창제를 넣고 소금이나 버터를 가미해야 먹을수 있다.

아니면 국수로 만들되 이것도 조리를 한 국물에 말아먹거나 양념을 해서 먹어야지 그 자체만으로는 먹을 수 없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대표적인 식품의 예로 쌀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쌀이 그만큼 완전식품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선, 쌀은 단맛이 있어 먹기가 좋다. 그리고 소화가 잘 될 뿐만 아니라 영양도 좋은 편이다. 쌀이 갖고 있는 이런 높은 ‘식품성’은 한자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가령 곡물 곡 자인 ‘穀’을 보자. 벼 화(禾) 자가 변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단일 글자로 가장 많은 뜻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氣) 자를 보자. 여기에도 쌀 미(米) 자가 들어가 있다. ‘기’라는 것은 유형·무형의 기운을 뜻하는 것으로 자연 만물의 가장 기본적인 그 무엇 을 뜻한다. 바로 그게 쌀로 구성되어 있다니 쌀이 만물의 근본이 된다는 말도 된다. 그 만큼 쌀을 중요한 것으로 본 것이다.

(3) 한국의 육식 전통

한국인들의 이동 경로는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에서 만주를 거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조상들을 가리켜 중국인들은 맥족(貊族)이라 불렀다. 이 맥족은 원래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 식생활도 가축과 큰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 한다.

이것은 그들의 벼슬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삼국지》위지·동이전을 보면 부여의 관직명이 모두 동물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馬加), 우가(牛 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과 같은 최고의 관직명이 그것이다(윤서석, 1995).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수신기(搜神記)》같은 중국의 고서에 바로 우리의 조상이던 맥족이 즐기던 음식이 나온다.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의 진(晉)나라 사람들이 맥적(貊 炙)이라는 이민족(고구려)의 음식을 지나치게 즐겨서 문제라는 식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이 맥적은 바로 맥족, 즉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먹던 불고기의 일종이었는데 고기를 꼬챙이에 꽂아 불 위에서 굽는 것이 ‘적(炙)’이라는 기록이 있다(이성우, 1985). 그런데 이 ‘적’은 중국식 불고기와 조리방식이 다르다. 전통적인 중국식 고기요리는 미리 양념을 하지 않는다.

고기를 그냥 굽거나 삶은 다음에 양념에 묻혀 먹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것은 고기를 구울 때 무장(無醬)으로 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구운 다음에 장을 더 이상 쓰지 않고 미리 양념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는 지금 우리가 먹는 불고기와도 비슷하다.

우리의 불고기가 일본음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 단지 양념으로 들어가는 재료들이나 그 양념하는 방식이 일본 풍처럼 보이지만 미리 양념을 해서 구어 먹는 것은 과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우리의 육식 전통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육식 전통은 그 이후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먼 옛날의 육식 전통은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이 정착되는 과정을 겪게 되고, 우리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인 채식 위주의 식습관이 정착하게 되지만 한편 육식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도 된다.

(4) 채식의 정착

시대적으로 보면 채식의 정착은 삼국시대에 이루어진다. 삼국시대에는 식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벼농사가 정착되면서 어느 정도 식생활이 안정되었다. 이것은 주식으로 쌀밥이 정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벼농사가 안정되었다고 일반 서민들까지 쌀을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때는 고대 국가체제가 시작된 후라 신분제도가 정착된다. 따라서 식생활도 귀족식과 서민식으로 나뉘게 된다. 고구려를 비롯해 상류 층의 주식으로서 쌀의 위치가 굳어진 게 바로 이 시대이다.

게다가 이전에는 쌀을 조리할 때 죽을 쑤어 먹거나 쪄서 먹었는데 이때부터는 지금처럼 쌀을 솥에다 끓여 먹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벽화를 보면 세 발 달린 ‘냄비’인 정(鼎)과 가마솥[부, 釜]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나타난 변화를 보면 귀족들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음식들을 조리하고 가공하고 저장하는 방법들이 발달하게 된다. 가공하고 저장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으로 메주를 발효시켜 장을 담그는 방법이 개발된다.

우리 음식에는 발효음식이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간장, 된장 만드는 게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현재의 우리 음식이 이렇게 채식 위주로 되어 있는 현상에 대해서 삼국시대 이후에 우리 음식이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뀐 데에서 그 먼 원인을 찾기도 한다.

물론 언제 부터 한국인의 식단이 채식으로 바뀌었냐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 리나라의 기후나 풍토를 볼때 한반도는 목축이 아니라 농경에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조상들도 자연히 채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고려조까지 불교국가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불교에서는 살생은 물론 육식도 금지한다. 실제로 고대에는 나라에서 아예 살생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한다. 신라에서는 법흥왕이 529년에 살생금지 법령을 선포하고 백제에서는 법왕이 599년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라는 법령을 발한 적이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고기 잡는 도구도 불태우게 해 어업 자체를 일절 금지시켰다. 고려조로 가면 이 살생금지 법령 때문에 어민들은 전직(轉職)을 하기도 하고 그 결과 어촌이 없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5) 콩의 종주국, 한국

우리 선조들이 주로 채식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 상태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콩을 요리해 여러 가지 식품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콩을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콩으로 만든 두부에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고 간장이나 된장에서도 훌륭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콩은 그 원산지가 우리나라, 정확히 말하면 만주지방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시경》에서 처음으로 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콩이 자체 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만주지방에서 중국으로 수입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콩을 가지고 여러 가지 변형음식을 만들어 냈다. 두부나 장이 그것이고 여기에 콩나물도 포함시킬 수 있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에서만 재배하여 먹는다고 알려 져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식품이다.

왜냐하면 콩은 그 자체에는 비타민 C가 없지만, 발아하여 콩나물이 되면 많은 양의 비타민 C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콩나물 100g을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 C의 1/3 정도를 먹는 것이다. 콩의 또 다른 가공품인 두부도 그렇다.

두부는 보통 중국 전한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중국 문헌에는 언급이 되지 않다가 당나라 말기나 송대 초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만일 두부가 전한 때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왜 당이나 송대까 지 문헌에서 언급이 안 되었던 것일까?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그때까지 콩의 원산지에 살고 있던 우리 조상들이 두부를 만들었는지 아니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자료가 없는게 안타깝다. 아마도 당시 우리 조상들이 콩을 항용하고 있었으니 두부도 만들 수 있었다고 보는데 이는 후학의 연구를 더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다.

장도 마찬 가지이다. 콩으로 만든 장은 우리의 발명품으로 본다. 중국에서 ‘장’이란 글자가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은 주나라의 이야기를 적은《주례》인데 이때 말하는 장은 고기를 말려서 가루로 만들고 이것을 술에 넣은 다음 누룩이나 소금을 넣어 만드는 육장(肉醬)을 말한다.

이것을 해(醢)나 혜(醯)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먹는 식해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메주는 한국이 시조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초기의 신문 왕이 부인이 될 사람의 집에 보낸 예물에 ‘장(醬)’과 시(豉)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식품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일본에 전해진 것을 통해 그 정체를 조금은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된장을 ‘미소’라고 하는데, 그 ‘미소’라는 것이 우리말이다.

(6) 국의 등장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국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한식의 중요한 특징은 주·부식 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식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게, 국(혹은, 찌개)이 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밥 먹을 때 국이 없는 밥상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국이 없으면 하다못해 찌개라도 있어야 했다. 요사이 매운탕과 같은 새로운 용어까지 만드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이나 찌개를 얼마나 좋아 하는 국물민족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때문에 우리 음식의 약점이 노출되 기도 한다.

한국음식이 갖는 큰 약점은 쓰레기를 너무 많이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그 주범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국이다. 국물이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음식들을 깨끗하게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반드시 극복 해야 할 문제로 생각된다.

(7) 차의 성행, 그리고 쇠퇴까지

신라시대에 음식사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차의 유행이다. 사실 이 차는 요즘에 와서 마시기 시작했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최근 들어 전통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이러한 차문화도 많이 보급되는 것 같다.

차는 불교와 관계가 깊은데,《삼국유사》같은 책을 보면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절에서는 부처님께 술을 공양할 수는 없으니 대신 차를 올렸고 그 영향 때문에 지금도 조상들께 드리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우리가 드리는 차례가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말은 차례라 해놓고 차는 안 올리고 술만 올리고 있다. 이렇게 차례란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봐서 이전에 차가 얼마나 유행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성행하던 차문화가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쇠퇴하게 된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한 국가로서 조선조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싫어함에 따라 불교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억압받게 되었고 차문화도 자연스럽게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그 결과 세계의 거의 모든 인류가 습관성적인 기호음료를 갖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인들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인들도 커피나 홍차 등을 마신다. 다른 민족들은 다 나름대로의 기호음료가 있는데, 한국인들에게만 기호음료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버려진 차문화는 일본으로 수출되어 그곳에서 만개되는데, 이런 역사의 상황을 보면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의 좋은 것을 버리고 저들은 취했다. 수많은 외화를 써가면서 커피를 수입해 마시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좀 더 우리의 차 맛을 알고 그 맛에 익숙했었더라면 커피를 그렇게 상용하는 습관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 고려시대의 식생활

음식의 전통과 관련해 고려조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일은 육식 전통의 부활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유목 목축민인 그들의 영향을 받아 다시금 육식을 하게 된다. 또한 몽골의 지배에 있을 때 소주가 전래됐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서민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은 소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주를 우리나라의 전통술로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만드는 방법이 조금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먹는 소주는 분명 원나라 지배 때에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조의 전반적인 음식문화 분위기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채식 위주의 식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채식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본에 가면 정진요리(精進料理)라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채식요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고려 초엽에 일어난 음식 전통의 변화를 꼽는다면 조미료의 발달과 기호식품의 보급을 꼽을 수 있다. 그 맥락에서 소금을 국가가 전매하는 일도 생긴다. 소금의 보급은 식품의 조리나 저장과 같은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다.

또 주막이 바로 이 시기에 생기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생활필수품의 판매 장으로 행랑이란 상가도 있었으며, 이 행랑에는 식료품상도 있었다.

또한 주점이나 쌍화점 등 전문음식을 파는 상점들이 발달하였다. 한편 이때에는 몽고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이 빈번하였으므로 차를 비롯한 외국식품의 거래도 많았다.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이 쓴《고려도경》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을 보면 고려 사람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상에 고기포나 생선, 채소 등을 잡다하게 많이 차려 놓고 말로는 별로 많이 차려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이 권하는 것을 예절로 알고, 술 먹는 데에 절도가 없다는 지적도 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들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손님을 초대해 놓고 ‘차린 것은 변변치 않지만 많이 드시라’고 한다. 이런 관습의 기원이 적어도 고려 때까지 올라간다는 얘기가 된다.

고려의 음식문화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되는 게 또 있다. 바로 국이 발달해 오늘날과 같은 식단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국은 앞에서 본 것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기록에 보이는데 부식 중에서 국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이때(고려) 의 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식생활의 기본적인 상차림인 밥과 국(그리고 김치)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이 시대에 확정되었다는 뜻이다. 이 시대에는 조미료도 발달 하여 국을 끓일 때에도 소금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시마나 된장, 후추, 파 같은 다양한 양념을 했다.

3) 조선시대의 식생활

조선의 음식문화사를 논할 때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그 전을 한식의 발달시대라 보고 그 후를 한식의 완성시대라 본다(강인희, 1980).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외래 작물의 수입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음식문화가 나뉘는 경향이 있다.

김치의 발달 외에도 조선 후기가 한국음식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이유가 또 있다. 강인희 교수(1980)는 이 시기를 한식의 완성 시기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후기에 와서 각 계층의 음식들이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전기는 신분질서가 엄격해 왕실과 양반, 그리고 서민들의 식습관이 섞이지 못했다.

그러나 임란 후 신분질서가 요동치면서 평민들의 지위가 높아지자 음식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궁중식이 양반식에 영향을 주고(봉 송) 그 양반식은 다시 평민식에 영향을 주게(꾸러미) 된다. 이와 같이 양반과 평민들의 식습관이 교류하면서 한식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또 이때가 되면 외국에서 많은 식품이 수입되고 서서히 정착이 된다. 고추의 수입은 말할 것도 없고 후추, 호박, 고구마, 감자, 옥수수, 낙화생, 완두 등의 다양한 식품들이 대량 유입된다. 또 수박이나 사과, 토마토 등도 들어오게 되어 당시에는 다양한 식품 들이 수입되고 소비되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우리 음식도 다양해지고 조리법도 많이 늘어나게 된다. 많은 음식 관련 책들이 저술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래서 대단한 발달이 있었다고 한다. 김치가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강인희 교수(1980)는 ‘고추의 전래는 담백미를 즐기던 전기시대 식생활과는 달리, 조화미로 후기시대 식생활 조리법을 변화시켰다’라고 한다. 고추가 없을 때는 담백하게 먹다가 고추로 양념을 하면서 매우 다양한 맛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를 한식의 완성시대로 보는데, 이 시기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한식이 완성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시기에 간행되었던 음식 관련 책들로 이 시기는 한식이 점차 발전되는 시기로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많은 음식 관련 책들이 나온다.

책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 책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 졌다는 것이다. 한식의 발달사를 두고 볼 때도 이 책들은 매우 중요하다.

4) 근대의 식생활

‘근대성(modernity)’은 국민국가의 체제 아래에서 서구의 근대가 제시한 합리성, 과학성, 도시화 등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유와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한국의 근대성’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제를 보면 주로 근대적 도시의 탄생과 산업화, 혹은 신여성의 등장, 종교의 근대성 등 매우 다양하지만 우리의 식생활이 어떻게 근대적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특히, 우리들이 영위하는 현재 음식문화의 형태는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는 근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된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서구화로 인해서 그 이전의 생활문화의 양상이 소멸과 지속, 그 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친다. 개항기 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식생활의 근대화에 다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산미증산계획’, ‘토지조사사업’에 의 해 근대화가 진행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 식민지 조선인들의 식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즉,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외국 식생활의 영향을 받고 우리의 전통 식생활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식생활 서구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5) 현대의 식생활

광복 이후 한국은 현대사회에 접어들게 된다. 현대 초기의 식생활은 광복 이후 최악의 극빈 상태에서 또다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의 미잉여 농산물 원조를 받아들이고 쌀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보리혼식, 분식장려 등으로 식량난을 해 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60년대가 되면 식량난 해결을 해 나가면서 영양에 대한 관심도 증대하여 식생활 개선이 촉진된다.

그러나 이때의 식생활 개선은 서구식 식습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되어 많은 문제를 양산한다. 1960년대 후기부터 시작된 현대 중기의 식생활은 1970년대에 이루어진 공업화의 양상으로 식생활도 공업화 내지 산업화의 과정을 밟는다.

이에 따라 식품공장에서 생산 된 즉석 가공식품들이 식생활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1970년대 후기 이후부터 시작된 현대 후기의 식생활은 동물성 식품 섭취량이 증가하고, 지방의 과잉 섭취로 인한 생활습관병의 발병률이 증가한다.

이로 인해 동물성 지방 섭취 위주의 서구 식생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난다. 또한 가공식품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도 증가되기 시작한다. 가공식품에 대한 반작용으로 건강식품, 무공해 유기농식품, 자연식품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합리적인 식생활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이루어진다.

최근 들어서는 지구를 생각하는 환경친화적인 식생활과 전통 식생활에 기반한 건강한 한국형 식생활을 실천하고, 감사하고 배려하는 녹색 식생활을 중시한다.

미래 한국인의 식생활문화
<그림 2-2 미래 한국인의 식생활문화>

6) 미래 한국 식생활의 전망

현대 한국의 식생활 형태는 개항 후 지난 1세기 동안, 특히 해방 이후 지난 50여 년간 새로운 식품의 수용 폭이 현저히 넓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쳤다.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인구 증가 및 경제력의 변화, 농업기술의 혁신, 식품산업 분야의 발달, 외식산업의 발달, 외래문화의 유입, 의학, 영양학 등 건강 관련 분야 발전에 따른 정보량의 증가, 국민의 의식구조 및 가족제도의 변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외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식생활은 전통적, 비전통적 식생활 사고와 행동이 깊숙이 융합되어 있으며,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인의 식생활 행동은 수정의 형식(A→A′)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본다.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식생활의 특성상 앞으로도 전형적인 서구형 식생활 양식으로 변화(A→B)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서구에서 도입된 영양학조차도 서구식 식생활의 건강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 고유의 식생활이 갖는 문화적 의미 및 건강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5000년의 식생활 역사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한식은 우리들에게 가장 최적의 건강식이다. 우리 민족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는 조상들의 식문화 전통을 환경과 건강과 인류복지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 알맞게 적응하여 발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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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전통한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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