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예전부터 주로 길렀던 가축은 소, 말, 돼지, 양, 개, 닭 등 육축과 오리, 거위 등이었다. 이 가운데 소와 말은 원칙적으로 도살이 금지 되었지만 실제로는 도살하여 식용하였다.
이규보는 「단우육(斷牛肉)」이란 시에서 농경을 돕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 주는 소의 고기를 먹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짓이라고 하였다.50) 이 글은 쇠고기 식용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인정상 차마 쇠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쇠고기 식용이 항상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소와 말을 도살하지 말고 닭, 돼지, 거위, 오리를 길러서 빈객 접대와 제사에 사용하라는 충숙왕의 말에서는 고려 후기 소와 말의 도살과 식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면 닭, 돼지, 오리 등의 사육은 부진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초에는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양민들이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도살을 한다고 할 정도로 쇠고기와 말고기의 식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식용을 목적으로 사육된 것은 주로 개와 닭, 돼지, 오리, 거위 등이었다.
1280년(충렬왕 6) 10월 일본 원정을 앞두고 원나라 행중서성(行中書省)이 공문을 보내 출정 군인들이 민가의 돼지, 닭, 거위, 오리 등을 잡아 먹지 못하게 한 것은51) 이들이 민가의 일반적인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점은 고려 말 조준의 상소에서도 확인 된다.
그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중앙에서 필요한 고기를 주로 지방 군현의 공물로 충당하고 있었다. 즉 조준은 당시 지방에서 삭선(朔膳)과 사신 접대를 위해서 농번기에도 사람을 동원하여 필요한 동물을 사냥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설치하여 그 용도에 쓸 것을 건의하였다.52)
한편 고려 시대의 가축 사육 기피는 불교의 무살계(無殺戒)와도 관련이 있었다. 1328년(충숙왕 15) 7월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승려 지공으로부터 계를 받은 계림부 사록 이광순이 임지에 가서 성황 제사에 고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주민들이 돼지 기르는 것을 엄히 금하자 그곳 사람들이 하루 동안에 돼지를 다 죽여 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53)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실제 고려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불교적인 이유로 도살금지령이 내린 예는 매우 드물다. 조선 건국 이후 소와 말에 대한 보호 정책이 강화되면서 식용을 위한 가축으로 주로 돼지, 개, 닭, 오리 등이 사육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농서에는 소와 말의 사육을 비롯해서 양, 돼지, 개, 닭, 오리 등을 사육하는 법이 상세하게 정리되었다. 가축의 사육뿐 아니라 유통 역시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려와 조선 시대에 소와 말의 가격이 정해진 것은 두 가축의 유통이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인 오천가에 말 시장과 돼지 시장이 있었으며, 조선 초 한양의 시전 배치 계획안에는 우전(牛廛)과 마전(馬廛)을 모두 장통방 아래 천변에 위치하도록 하였다.54)
이처럼 가축 시장은 행랑 단위로 규모가 정해졌던 다른 시장과 달리 천변의 넓은 공터에 있었는데, 이는 가축 시장의 특성상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고 가축의 배설물 처리에도 천변이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가축의 도살과 정육의 유통 역시 이루어졌을 것인데, 구체적인 양상을 살피기는 어렵다. 우선 도살의 경우 위생을 고려한 정해진 법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소와 말의 도살 금지와 관련된 조치들도 도살 자체 를 문제 삼을 뿐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긍이 『고려도경』에 묘사한 것처럼 돼지나 양, 개 등 작은 가축은 산 짐승의 네 다리를 묶어 불 속에 넣어 죽인 후 도살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을 것이다.55)
또한 궁궐 안에서도 왕실에 음식을 제공하는 관청에서는 도살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구체적인 양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려 광종 때 도살을 금하고 육선(肉饍)을 시전에서 구하여 올렸다는 기록과56) 충혜왕이 소를 잡아 매일 쇠고기 15근씩을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참고가 된다.57)
또 1282년(충렬왕 8) 7월 충렬왕비 제국 대장 공주가 병이 들자 응방(鷹坊)에서 소 잡는 것을 금하였다는 기록도58) 당시 도살의 주체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양민들이 고기를 시장에 팔기 위해서 도살을 한다 한 것을 보면 시전을 비롯한 도시 곳 곳에서 육류가 유통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국가가 소 잡는 것을 금하여도 사람들이 쇠고기를 최고로 여겼기 때문에 소의 도살과 쇠고기의 유통은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