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도토리 등 산속의 열매들은 인류가 채집 생활을 할 때부터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을 뿐 아니라 농업 재생산 구조가 확고하지 못한 고려나 조선 시대에도 이들 열매들은 매우 중요한 구황 식품이었다.
예전부터 산과 강을 끼고 촌락이 발달한 것은 집 근처에서 쉽게 비상식량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나는 열매 중 도토리와 밤은 예로부터 산속의 대표적인 식품이어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탄화된 도토리와 밤 따위가 발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려 충선왕이 즉위 후 도토리를 맛보았다는 일화는 도토리가 대표적인 구황 식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고려 말의 문학 작품인 이달충(李達衷)의 「산촌잡영(山村雜詠)」 과 윤여형(尹汝衡)의 「상률가(橡栗歌)」에는 당시 농촌이나 산촌 사람들에게 밤과 도토리가 얼마나 중요한 식량인지 잘 묘사되어 있다.41)
이달충은 “단풍 옹이 찍어다가 그릇 만들고, 도토리 살쪘으니 삶아 밥 대신”한다고 읊었으며, 윤여형은 “몇 천명 장정은 흩어져 나가고, 늙은이와 어린이만 남아서 거꾸로 달린 종처럼 빈 집을 지키누나. 차마 몸을 시궁창에 박고 죽을 수 없어,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토리며 밤이며 줍는다.”고 하였다.
이런 장면은 고려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니, 흉년으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어야 할 때 산속의 밤과 도토리 등은 시기를 막론하고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비상 식품이었다.
물론 이때의 밤과 도토리는 요즈음 먹고 살만한 등산객들이 다람쥐와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도토리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