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본대로 과일나무를 심으면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과수 재배를 권장하였고, 당시 사람들도 마을 어귀나 산기슭은 물론이고 도시의 빈터나 정원에도 과일나무를 즐겨 심었다.
신라 후기 촌락 문서에는 호두나무 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 명종은 백성들에게 곡식 뿐 아니라 밤, 잣, 배, 대추나무 등 과수 재배를 권장하는 교서를 내린 일이 있었다.
이규보는 앵계 근처에 살면서 주변에서 뽕나무, 삼나무, 복숭아나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규보는 「통재기」에서 양응재의 정원에 진귀한 나무와 좋은 과실수가 늘어서 있었으며, 포도가 나무에 감기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렇게 고려 시대에는 과수 재배가 일반화되었고, 이에 따라 과수 재배 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이규보의 「접과 기(接菓記)」36)에는 배나무 접을 잘했던 전씨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전 씨의 기술은 나쁜 배나무에 좋은 배나무 가지를 꽂아 좋은 배나무를 만드는 이른바 과수 접붙이기였다. 이런 기술은 배나무뿐 아니라 다른 과수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기술은 지속적으로 전해져서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산림경제』에는 과일나무 접붙이는 법(揷樹法·接樹)의 시기, 대상 나무의 크기, 방법, 주의할 점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이어서 허리접(腰接)과 뿌리접(根接)을 소개하였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