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우리음식 이야기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4. 나무에 열리는 음식, 과일
  • 이동

h2mark 귀하신 과일, 감귤과 포도

현재 제주를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는 귤은 언제부터 제주에서 재배되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 시대부터 보이지만 정황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에서 귤이 재배되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제주의 귤은 중앙에 공물로 납부되었는데, 1052년(문종 6)에 탐라에서 바치는 귤은 100포로 정해졌다. 이 밖에도 고려 시대에는 일본과 대마도에서 귤을 바친 예가 있다. 귤은 팔관회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궁궐에서 사용하였다.

충렬왕대의 장군 장운(張芸)은 팔관회 때 오봉루에 올라가 상 위의 귤과 유자를 손으로 집는 무례한 행동을 하여 왕의 미움을 받아 파면된 일이 있으며,20) 명종 때 태자의 폐비(嬖婢)는 최비(崔斐)를 보고 귤을 던져 유혹한 사례가 있다.21)

모두 귤이 매우 귀한 과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한편 충렬왕 때 임정기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제주의 귤나무 두 그루를 소 열두 마리를 동원하여 궁궐까지 옮겼는데, 오는 동안 잎과 가지가 다 말라서 임정기도 쓸모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바쳤다고 한다.22)

좀 더 흥미 있는 것은 충렬왕 때 활동했던 곽예(郭預)가 지은 「영귤수(詠橘樹)」라는 한시이다.23) 이 시는 당시 궁궐에 심어진 귤나무를 노래한 것인데, 시기적으로 보아 바로 임정기가 가져와 심었던 귤나무로 보인다.

곽예는 궁궐 정원에 뿌리 내린 귤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만발한 흰 꽃을 읊고 있으니, 가져올 때 말랐던 귤나무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곽예 역시 왕에게 아첨하려고 이렇게 노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감귤은 수요가 훨씬 많아졌다.

당시 감귤의 종류로는 금귤, 유감, 동정귤, 감자, 청귤, 유자, 산귤 등이 있었다. 대부분 제주에서만 나는 매우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 천신 등 제수용, 외국 사신을 비롯한 빈객 접대용, 경연에 참여한 관료들이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하사품 등으로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왕은 때때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내리고 시험을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귤은 1392년(태조 원년)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공물을 정할 때 별공(別貢)으로 규정되었고, 국가에서 필요한 감귤류는 모두 제주의 공납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따라 감귤 공납으로 인한 제주에서의 민폐는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제주에서는 감귤나무에 대한 공납이 심해서 감귤나무가 나면 끓는 물을 부어서 나무를 죽인다고 영조가 말할 정도였다.24)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제주의 감귤 농가를 보호하는 정책을 펴는 한편 다른 지역에서도 감귤 재배를 시도하였다. 태종 때에는 전라도 해안 지역에 감귤나 무를 옮겨 심어 감귤을 육지에 보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25)

이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중종 때 포기를 선언하였지만 한때 이 지역에서 감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 영암·강진·순천·고흥의 토산으로 감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조 때에는 중국에서 감귤 종자를 구해서 제주에 심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감귤은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매우 귀한 존재로 남아 감귤은 뇌물 품목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숙종 때에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 줄 때 서로 차지하려고 잡고 빼앗는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니26) 당시 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귀한 과일로는 귤 외에 포도가 있었다. 포도는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 서역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는 「통재기(通齋記)」에서 양응재의 정원에 있는 포도가 나무에 감기어 아래로 늘어진 것이 영락 같다고 묘사하였으며,27) 이 색은 포도가 겹겹이 그늘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였고,28) 포도가 시렁에 가득한 것이 마치 푸른빛이 흐르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였는데,29) 이색은 절집에 심은 포도를 보고 읊은 것 같다.

특히 이인복(李仁復, 1308∼1374)은 정휘의 포도헌 시렁에 가득 찬 포도 덩굴을 보고 쓴 시를 남기고 있다.30) 이를 통하여 당시 절이나 관리들의 집 정원에서 포도를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청자 문양에 포도가 있는 것도 당시 포도에 관심이 컸던 사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충렬왕에게 몇 차례 포도주를 보낸 것으로 보아31) 포도가 귀한 과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시대의 포도는 감귤보다도 더 귀했던 것 같다. 감귤은 제주라는 분명한 생산지가 있었지만 포도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32)

『조선 왕조 실록』에는 마유(馬乳) 포도와 수정포도 두 종류가 보이는데, 지금의 먹포도와 청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포도는 전문적으로 재배하기 보다는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개인 집 정원이나 궁궐 혹은 관청 정원에 심는 정도였다.

1411년(태종 11) 8월에 검교참의(檢校叅議) 박승(朴昇)이 포도를 바치자 쌀 5석을 내렸던 것에서33) 당시 포도의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509년(중종 4) 8월에는 장원서에서 박중근(朴中根)이라는 사람 집 정원에 있는 포도를 진상품으로 봉하여 두었는데, 집 주인이 포도를 따버리자 그를 벌준 일이 있다.34)

또 1475년(성종 6) 8월에 죽은 정척(鄭陟)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세종이 몸이 아파 포도를 먹고 싶어 하므로 정척이 자기 집 정원의 수정포도를 따다가 바쳤고, 이후 세조 때까지 계속 포도를 바쳤다 한다.35) 이런 사례들은 포도가 매우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문대작』에서 포도를 소개하면서 마유포도는 드물고 신천 윤대련의 집에 한 그루가 있는 데 맛이 가장 좋아서 중국 것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산림경제』 에서 영희전 재실의 마유포도를 소개한 것은 조선 후기까지 포도나무 개채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