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경우 영창서관에서 총 4판까지 발행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문헌적 가치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이성우이며, 그 해제는 한국식경대전의 조리서 관련 분류에 속해있다.
해제를 확인하면 이성우는『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1943년(昭和 18년)이 발행연도라고 말했다. 이성우는 한국식경대전 저술 당시에는 책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에는 1924년 판이 가장 먼저 나오고 1943년에 증보판이 재발행되었다고 해제를 달았다.
이성우는 한문요리서인 『임원경제지』『정조지』를 한글로 번역한 부분이 있고 저자가 신식요리 등을 덧붙였다고 가장 먼저 주장하였으나,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168)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주관했던 음식책 전시(2001)에서는 이성우의 해제에 따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1943년에 출간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169)
궁중음식연구원에서는 옛 음식책을 복원하는 옛음식연구회를 결성하고 음식책 전시가 열리기 2달 전 편역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출간하였는데, 이에서도 1943년 판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170) 본고에서 추적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원본과 영인본은 모두 다음과 같으며, 소장처를 명시했다.
<표 16>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판본과 소장처
실제 실물이 확인되는 판본은 초판과 3판이다. 초판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171), 3판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민속원과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영인한 판본도 3판이다.172) 3판의 서지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판, 재판, 3판은 1924년, 1930년, 1936년에 발행되었다.
단, 4판의 소재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데, 이성우가 소장한 판본이 1943년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실제 『고식문헌집성』에 영인된 판본은 초판으로 추정 된다. 1931년에 발행된 재판도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판본으로, 연세대학교 국학도서관 소장본이 재판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연세대학교 소장본은 표지와 판권 이후 부분이 모두 소실된 상태이지만 목차를 확인할 때 서양요리 증보, 일본요리 증보의 부분이 추가되어 있지 않아, 초판이나 재판으로 판단된다.
단 초판의 목차만을 확인할 때 연세대학교 국학도서관 소장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만일 연세대학교 국학도서관 소장본이 재판일 경우 초판과 재판에는 내용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성우와 궁중음식연구원이 1943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4판 판본이 존재한다고 명시한 것과 달리, 4판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편이다. 특히 어느 시점 이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판권을 보유하였는데,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1935년에 발간한 도서목록에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173)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가정 부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가격은 80전으로 배송료를 제외한 원래의 가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옆에는 조선요리제법의 이름도 함께 적혀있다.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민간 출판사들이 모여 출자하였으므로 강의영이 판권을 함께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강의영이 한성도서주식회사에 관여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