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서는 앞서 『조선요리제법』의 출판사와 광고를 살펴보았듯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출판사와 광고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영창서관에서 계속 발행되었으며 영창서관은 동아일보에 광고를 실었다. 광고에 실린 광고 문구의 내용 가운데서 가격, 책의 형태, 포함 내용, 주요 독자층 등을 분석할 수 있으므로 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출판사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출판과 판매를 겸한 영창서관은 초기 척독류(尺牘類, 편지류)를 다수 찍어냈다. 초기의 주요 출판물로는 『시행가정척독(時行家庭尺牘)』, 『무쌍신식간독(無雙新式簡牘)』, 『신식보통척독(新式普通尺牘)』등의 저서가 있으며, 1930년대 초에는 연간 매출액이 6만 여원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문방구 등 여러 분야와 소설·수양서·위인전기서·사상서·철학·종교서·각본서·음악서·동화·동요서·경서(經書)·법첩(法帖)·교과서·참고서·어학·문법서·자전(字典) 및 사전 등 총판업도 겸하였다.
방효순에 따르면 영창서관은 박문서관과 더불어 식민지시기 동안 가장 많은 출판물을 낸 곳이다. 또한 판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영창서관 내 인쇄소를 구비하고 있었다. 영창서관은 출판물 총수가 총 720권 정도이며,151) 독특한 경영전략으로 출판활동이 식민지 말에 더욱 활발해졌다고 한다.
<그림 15>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36년 제 3판 판권사항(단국대학교 소장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1936년판 서지사항을 확인하면 영창서관과 한흥서림(韓興書林)이 발행소로 적혀있다. 한흥서림은 영창서관과 마찬가지로 강의영이 같이 경영한 출판소이다.
다만 한흥서림 단독으로 서적을 발행한 것이 아니라, 공동출판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52)아래의 판권사항을 확인하면, 1936년에 영창서관은 종로 2정목 84번지, 한흥서림은 관철동 100번지에 있어 두 출판사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이 외에도 진흥서림(振興書林) 또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발행소이다.153) 그러나 이 진흥서림은 한흥서림 바로 옆에 있었다는 주소(관철동 99번지)가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발행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실제 책을 발행 했는지 분매소의 역할만을 담당했는지도 의문이다.
가까운 발행소끼리 책을 공동으로 발행하고 분매했던 관행이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영창서관에서 발행한 요리책으로, 그 성격을 가정 실용서로 평가할 수 있다.154)
식민지시기 대중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소설과 필수적이었던 교과서류 등은 많은 부수가 발행되었으나, 실용서는 그 종류가 적고 어느 정도의 부수가 판매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특히 요리 등 가사 전반을 배울 수 있는 책은 매우 소수였다.
가사의 전반은 여성의 소임이었으므로, 가사 관련 책은 주로 여성을 독자층으로 삼았다. 요리책은 1910년~1920년 사이에는 조선요리제법,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기타 서양서와 일본서가 전부였다. 여성을 위한 가사책은 이 외에도 가정보감(家庭寶鑑)류가 있다.
현대의 가정백과와 가깝다고 여겨질 수도 있으나, 가정보감은 전통적인 사유에 근거한 아녀자들의 수양서 겸 각종 실용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창서관은 이와 같은 가정보감을 순언문으로 1910년대부터 1920년까지 발행하였으며, ‘부인’으로 불리는 중년 여성을 독자로 간주하는 광고를 신문 등에 실었다.155)
영창서관의 영업지침이 실익을 근거로 했으므로 실제 구매자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책을 발행해야 하는 것이 선결적이었을 것이다. 보감(寶鑑)류, 일용전서(日用全書)류는 다른 출판사에서도 발행한 흔적이 보이지만,156) 요리법을 포함한 책과 보감류를 모두 활발히 발행한 곳은 영창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기 총독부에서는 출판법에 따라 서적을 엄격히 검열하였으며, 영창서관도 출판허가를 받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157) 식민지시기 출판사는 여러 제약이 걸려 있었지만, 영창서관은 민간출판사로서는 성업하였으며, 대중의 지식을 함양하는 도서를 발행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영창서관은 강의영이 사망하고 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으로 이전하여 소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으로 경영되다가 폐업하였다고 한다.158) 식민지시기 출판자본주의가 자리 잡아가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출판사 중 하나이다.
나. 광고
영창서관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서적을 광고했다. 주로 동아일보에서 영창서관의 서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단독 광고의 형태와 동아일보 내에서 작성한 신간 서적 소개 기사의 형태를 보인다. 총 6개의 광고를 동아일보에서 검색으로 찾을 수 있었다.159) 요리책 저작권 소송이 발생했던 1933년 이후에 1936년 제 3판이 발행되지만 그와 관련된 광고를 찾을 수 없었다.
<표 15>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서적 광고
위의 표를 확인하면 단독 개별형 광고가 주를 이루며, 1924년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가장 광고가 많이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1930년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 다시 재판되는 해로, 그 사이 1926년과 1927년에 다시 개별형 광고가 실렸다. 1924년 초판에 대한 광고는 1번부터 3번까지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림 16>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동아일보》1924년 12월 14일, 20일, 25일자
가정필비(家庭必備)의 보전(寶典)!! 요리법(料理法)의 나침반(羅盤針)!!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전 1책(全壹冊) 국판대본(菊版⼤本)
● 373항(參百參拾⾴)● 정가금 송료 모두 98전 (定價⾦送料並九拾⼋錢)
▲ 조선 고금 독종 요리법(朝鮮古今讀種料理法) 845칙(⼋百四拾五則)을 망라(網羅)하아
▲ 평이(平易)한 문사(⽂辭)로 질서정연(秩序整然)하게 서설(敍說)한 창유기서(創有奇書)
▲ 장(醬), 유(油), 초(醋), 밀(蜜)의 제조법(製造法)과 채소어육(菜蔬⿂⾁)의 요리법(調理法)이며
▲ 주식미죽(酒⾷糜粥)의 일용품(⽇⽤品)과 병고(餠餻)다과(茶菓)의 사치품(奢侈品)이며
▲ 지(漬), 염(鹽), 회(膾), 포(脯), 팽(烹), 적(炙), 탕(湯), 전(煎) 등을 일절 포함(論)하고
▲ 별(別)로 지나(⽀那). 일본(⽇本). 서양(西洋) 등 외국 식품 80종 제법(製法) 부록(附錄)
▲ 자양(滋養)과 지미(旨味)를 위하야 가가(家家)에 불가불비(不可不備)할 보전(寶典)
...
발행소 경성부 종로 2(貳) 정목(丁⽬) 84 진체(振替) 구좌(⼝座) 경성 6231번160)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광고 옆에는 영창서관에서 발행했던 도서목록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이 광고는 한문을 위주로 한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어있다.
국한문 혼용체는 주로 1)국문 위주 국한문 혼용 2) 한문 위주 국한문 혼용 등이 있으며 경서, 의서, 척독서, 한문 소설, 만세력, 점성서 등으로 구지식인 계층의 독서물이 대부분이었다.161)
영창서관은 주로 광고를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하였는데,162) 국한문 혼용체를 자주 쓰는 신문인 동아일보를 읽는 독자층들에게 이런 국한문 혼용체를 읽는 것은 무리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같은 시기인 1924년에 조선요리제법이 순한글로 광고되었던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본문의 내용에서 평이한 문체로 질서정연하게 서술된 책이라고 칭하는데, 실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문체는 국한문 혼용체와 순한글체가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한자음이 괄호로 부기된 국한문 혼용체이다.
1936년판 판권을 참조하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초판은 1924년(다이쇼(大正)13년) 11월 10일에 발행되었다.
그리고 12월 14일, 20일, 25일 등 5~6일의 간격을 두고 초판을 홍보하였는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개별형 광고는 우측에, 영창서관 발행 도서는 목록형으로 좌측에 있는 형태로, 맨 좌측에서 영창서관의 주소와 구좌번호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내세우는 주요 문구는 “가정(家庭)에서 꼭 가져야 할 보감”과 “요리법의 나침반”이다. 식민지시기 ‘신가정’이라는 담론과도 무관하지 않은 이 대목은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광고 본문에서 건강(자양)과 맛을 위해 집집마다 소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근대 영양 개념이 투입된 신가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국판대본(菊版大本)의 판형 규격으로 인쇄되었다는 것을 이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판에는 국판(148×210㎜), 신국판(152×223㎜), 신국판형(169×230㎜) 등의 규격이 있으며, 방효순(2001)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1936년판을 신국판으로 판단했다.163) 신국판은 식민지시기 출판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유형 중 하나로, 4·6판과 더불어 흔한 규격에 속한다.
신국판형은 다소 무게가 있는 주제 분야의 서적에 이용되었으며, 문학서에서는 한문위주의 국한문 혼용서에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위에서 말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특성과 더불어 그 문체 특징과도 일치한다.
또한, 총 373쪽이었으므로 그 당시 서적에 비해 큰 판형으로 인쇄해야 가독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요리법은 총 845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1931년 내용이 추가되고 개정된 조선요리제법(520항)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다.
각종 요리의 종류를 언급하여 많은 요리법을 보유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주식미죽(酒食糜粥)과 병고다과(餠餻茶菓)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술과 밥, 죽과 미음과 떡, 차와 과자를 뜻하는 이 표현은 조선시기부터 상용되었던 것으로, 지(漬), 염(鹽), 회(膾), 포(脯), 팽(烹), 적(炙), 탕(湯), 전(煎)도 마찬가지이다.
이 단어는 목차에서 그대로 이용되지는 않았으나, 요리법 옆에 적힌 한자를 비교해 볼 때, 각각 침채 만드는 법, 소금 두는 법, 회 만드는 법, 포 만드는 법, 구이 만드는 법, 국 끓이는 법 등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중국 요리, 서양 요리, 일본 요리가 80종이 부록으로 수록되었다고 홍보했다.
…자양(滋養)과 지미(旨味)를 위하여 가가(家家)에 불가불비(不可不備)할 양가숙녀(良家淑⼥)의 보전(寶典)
발행소 경성부 종로 2정목 84번지 진체(振替) 경성 6231번 전화 광화문 1532번
영창서관
경성부 봉익동(鳳翼洞) 55번지의 6 진체(振替) 경성 10,179번 한흥서림(韓興書林)164)
<그림 17>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동아일보》1926년 2월 24일자
초판이 발행되고 2년 후, 동아일보에 또다시 광고가 실렸다. 내용은 1924년의 광고와 거의 동일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다소 바뀌었다. ‘양가 숙녀의 보전’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독자층을 명시해주는 광고 문구이다. 즉 양가숙녀란 지체 있는 집안의 교양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숙녀라는 표현은 신사와 숙녀라는 근대적 표현으로도 자주 사용되었으나, 양갓집(良家)이라는 표현과 함께 쓰인 것으로 볼 때 전통적인 요조숙녀(窈窕淑女)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근대의 여성들을 구여성과 신여성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그 당시 여성을 복합적으로 세세하게 다루지 못하므로 지양해야 하지만, 숙녀는 적어도 국한문혼용체를 읽을 수 있었던 구여성 식자층에 밀접한 표현이다. 이 광고부터는 한흥서림에서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 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한흥서림의 주소와 구좌가 나오며, 영창서관에서 가까운 장소인 봉익동(현재의 창덕궁 근처 봉익동)에 한흥서림이 위치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개별형 광고 옆에는 역시 영창서관과 한흥서림에서 발행된 도서인 『(외교흑막열국) 궁연(宮延)의 비밀』의 개별형 광고가 게재되었다.
외교 관련 처세술 도서로 보이며, 별다른 정보는 없으나 본문에 의하면 청년들을 위한 실용서이다. 1년 뒤인 1927년에서도 동아일보에 개별형 광고가 게재되었다. 1926년 광고가 같은 내용이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 광고 문구로 추가된 것을 영창서관 주소 우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만 종(萬種)의 서적을 완비(完備)하여 정당(正當)한 가격(價格)으로 제공(提供) 신속(迅速) 수응(酬應) 친절(親切) 신용(信⽤)을 본 관(本舘)의 사명(使命) 으로165)
<그림 18>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동아일보》1927년 1월 12일자
이는 영창서관의 영업을 홍보하는 문구로 영창서관이 많은 책을 구비하여 값을 속이지 않는다는 본 출판사의 영업지침을 나타낸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우측에 위치한 개별형 광고는 『(비극)눈물』이라는 제목의 신소설이며,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이상협(李相協, 1893~1957)이 저자로 1913년 초판이 발행된 것으로 알려졌다.166)
대부분 한문혼용체로 작성된 영창서관의 광고와는 달리 순한글로 쓰인 것이 특징이며, 이는 신소설이므로 독자층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비극)눈물』은 166페이지로, 가격은 배송료를 합쳐 1원 20전이다.
이는 총 400쪽에 준하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보다 더 높은 가격이다. 가격을 어떤 식으로 책정했는지는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소설이 구매도가 높고 독자층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 19>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동아일보》1930년 11월 14일자
<그림 19>는 동아일보에 주기적으로 실렸던 출판 관련 정보를 다루는 『출판일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는 출판사의 상업 광고 형태가 아닌 신문 자체 내에서 서적 정보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10일자 도서과 납본(納本)’이라는 부제는 동아일보 도서과(圖書課)에 출판사가 책을 제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문(朝鮮文)과 일본문(日本文)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조선문 5번째 세모 표시(▲)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강의영”을 찾아볼 수 있다.
영창서관은 동아일보에 책을 납본하였고, 동아일보에서 이를 「출판일보」 기사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제 2판 이후의 광고는 1930년 이후로부터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167)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서적 광고를 확인한 결과, 『조선요리제법』의 서적 광고와 마찬가지로 1) 책의 외관 2) 책에 포함된 내용 3) 홍보 문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국한문 혼용체로 『조선요리제법』만큼 쉬운 내용임을 강조할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상당히 많은 가짓수의 요리법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강점으로 내세워 홍보했다.
또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주된 독자층은 광고에서 나타나듯이, 가정의 부인들이었지만, ‘양가숙녀’라는 점이 강조되어 ‘양처현모’를 지향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