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27년 (1704년) 현일은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맑은 여름날이었다. 매미소리가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제생(諸生)이 줄지어 마루에 앉아 경을 읽는 소리가 매미소리를 덮을 정도로 크게 퍼지고 있었다. 낮고 단조로운 울림이 이어졌다. 현일은 이미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희고 긴 눈썹 아래의 눈빛은 젊을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현일은 수차례나 대사헌,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때마다 사직 상소를 올렸음에도 결국 관직에 올랐다. 시국은 급변하였다. 갑인예송과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들은 대거 조정에 올랐으며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사사됐다.
잠깐 남인들이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희빈 장씨가 죽고 인현황후가 복위하면서 소위 갑술환국이 벌어졌다. 남인의 거물이었던 현일은 귀양길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 석계처럼 후학을 기르며 살았다. 지금 현일은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온 것을 알았다. 그의 눈앞으로 스승이자 외조부인 경당의 얼굴이 지나갔다.
퇴계에서 학봉, 학봉에서 경당으로 이어지는 남인의 거대한 축(軸). 그것은 기실 퇴계학파의 본간(本幹)이자 중추(中樞)였다. 흥효에게 받은 학문의 맥은 지금 현일을 타고 흐른다. 아버지인 시명의 얼굴도 지나갔다. 대의(大義)라는 무게에 짓눌렸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아버지... 죽은 형 휘일의 얼굴도 지나갔다.
그토록 재능 넘치던 아까운 형이었는데. 그리고 맨 나중에 어머니 계향의 얼굴이 지나갔다. 아, 어머니, 세속에 이름을 얻기보다 군자 되기를 힘쓰라고 우리 형제들을 가르치셨던 어머니, 현일은 자신이 썼던 어머니에 관한 기록, <안동장씨실기>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옆으로 누웠다.
그가 가르치는 유생들이 논어를 독송하는 소리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불온이면 불역군자호>라!
덧붙임: 장계향은 사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의 벼슬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정부인의 교지를 받는다. 당시 여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계향>이란 실명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안동대학 민속학과 배영동 교수의 치열한 연구 덕분이었다.
♣ 정부인 장계향 年譜
1598년 안동 춘파 출생
1610년(13세) 학발시, 경신음, 성인음, 소소음 등을 이 무렵 짓다.
1615년(18세) 어머니가 장질부사로 몸져눕자 집안 일을 맡다.
1616년(19세) 영해 인량리의 재령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 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에게 출가하다.
1622년(25세) 친정 모친 권씨부인 별세.
1631년(34세) 석계종택을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으로 이주.
1633년(36세) 친정 부친 경당 선생 별세
1634년(37세) 시아버지 이함 선생 별세
1642년(45세) 일곱 아들이 세칭 칠현자로 일컬어짐
1644년(47세) 시어머니 증정부인 진성이씨 별세.
1652년(55세) 병자국치를 슬퍼하며 영양군 수비로 이거.
1664년(67세) 신급(벽계 이은), 성급(밀암 이재)에게 학문을 권려하는 오언시를 써주다.
1670년(73세) 희우희를 씀. 그 당시의 넉넉하고 평온했던 심정이 드러난다.
1672년(75세) 차남 휘일 사망, 조선조 전통음식 요리서인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 저술.
1673년(76세) 안동부 대명동(풍산읍 수곡리)로 이사, 부군 석계 선생 별세(84세).
1680년(83세) 7월 7일 영해부 석보에서 별세.
1689년 8월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로 인해 정부인 교지 받다.
1704년 현일 사망
김 서 령 Kim seo―ryung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