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발달과정을 추측하건데, 우리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여 농경형 식생활이 형성되었고, 농경에서 산출한 곡류에 자연적으로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한 술을 빚어왔다.
고구려 건국 초기(AD 28 년)에 “지주(旨酒)를 빚어 한나라의 요동 태수를 물리쳤다.”는 기록과, 중국인들 사이에 “고구려는 ‘자희선장양{自喜善藏釀)’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았으며,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고구려 여인이 빚은 “곡아주(曲阿酒)”가 강소성일대에서 명주로 알려졌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의 최고 기록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백제사람 인번(수수보리)이 누룩을 이용한 술빚는 기술을 전해 와, 천황이 이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인번을 ‘주신’으로 모셨다.”고 하였고, 또한 <본초월령> “6 月令”에 “응신천황 때 수수보리가 참례하여 조주가 처음으로 시작되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술 빚는 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의 양주법은 쌀로 빚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울러 백제의 양주기술이 일본에 처음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술의 종류가 다양화됨과 동시에, 특히 증류법이 도입되어 전대의 양주기술과 함계 술은 더욱 발달하였다.
이때 양주업은 인력과 재력이 집중되었던 사원을 중심으로 경영되었다. 국가에서 해동통보(海東通寶)의 유통을 목적으로 공설주점과 원(院)을 세우면서 주정 와에 객관(客館)이 증설되어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양주업이 성행했다.
이 시기의 술은 크게 청중, 탁주, 소주, 과실주로 분류되는데, 청주를 위시하여 법주, 과실주와 생약재를 가미해서 빚은 약용약주, 꽃의 향을 가미해서 빚은 기향주 등 다양한 기술의 발전을 보였다.
한편, 원나라로부터 도입된 증류법은 획기적인 일로, 우리의 음주문화와 양주법에 일대 변화를 가제오게 된다. <고려사>에 신우왕 원년 교서로 “소주음용금지령”이 공포된 것을 보면 신우왕 원년(1375) 소주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지(1277) 근 100 년에 달한다.
이때 중국으로부터 소주 빚는 법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선 전기에는 멥쌀보다 찹쌀 위주의 양주원료 사용이 증가하고, 양주기법도 단양법에서 중양법으로의 전환이 뚜렷해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양주기법 면으로는 점차 고급화 추세를 지향하는 한편,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중양주를 선호하게 되어 백로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부의주, 향온주, 하향주, 춘주, 국화주 등이 명주로서 주품을 자랑했다.
특히 고려 말엽에 정착된 증류주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급속한 신장과 함께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이 빈번해지는 등 증류문화가 국제화 단계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특징으로는, 지방색을 띤 다양한 고급 명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통주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주품을 자랑하던 명주로는, 서울의 약산춘 등과 평양의 벽향주, 김제와 충주의 청명주, 제주도의 초정주, 충남 한산의 소곡주, 그리고 두견주, 과하주, 도화주, 송순주 등이 주막에서 팔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양주기술 가운데 ‘혼양주 기법’을 빼놓을 수 없다.
혼양주류는 양주곡주와 증류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이채롭다. 혼양주법은 곡주 양주기법을 골격으로 양주용수 대신 소주를 이용한 양주기술로 여름에도 술이 변하지 않도록, 저장성과 소주의 주독을 해소시킨 방법이라는 점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국운이 쇠퇴하면서 1907 년 7 월 조선총곡부에 의해 “주세령”이 공포되었다. 또 같은 해 8 월에는 ‘주세령 세척’의 공포가 있었고, 다시 9 월에는 주세령을 근거로 한 강제 집행이 시작되었는데, 전통주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수 백종의 달했던 전통주가 잠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각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양주의 밀조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에 일제는 1916 년 1 월 밀주제조에 대한 단속강화와 함께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 소주로 획일화 규격화 시키는 <주세법>을 제정, 발표하게 되면서, 조선의 가양주와 그 문화는 단절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광복 이후 우리 정부의 주세정책이었다. 조선총독부 치하의 주세행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전래의 유명 전통주, 토속주들이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또한 6·25 동란 이후 식량난의 도래로 밀주단속이 계속되었고, 1965 년 급기야 ‘양곡관리법’이 제정 발표되면서, 표면화된 밀주단속과 강제집행은 전통주의 단절, 멸실을 자초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소위 ‘가전비법’이라고 하여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여인네들에 의해, 그리고 글을 알지 못했던 관계로 구전과 경험에 의존하여 그 명맥을 이어왔을 뿐, 술 빚는 법의 기록과 보존에 소흘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