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과일주
○ 고려사의 포도주 이야기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 원나라 세조 쿠비라이칸이 고려로 시집가는 ‘홀도로게리미실’을 위하여 고려의 왕에게 포도주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 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과일주의 첫 번째 기록이다. 아마 서역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포도주를 사위인 충렬왕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산림경제의 포도주 이야기
국내에서 포도주 만드는 방법은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술한 소백과사전적인 책인 산림경제에 등장한다.
"익은 포도를 비벼 즙을 내고, 찹쌀밥, 흰누룩과 함께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되는데 맛이 훌륭하다. 머루(산포도)도 좋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와은 사뭇 다른점이 있다. 이때의 포도주는 쌀을 원료로한 곡주에 포도를 넣어 만든 것이 특징이다.
○ 하멜의 포도주 이야기
네덜란드인 하멜이 인도에서 동중 국해를 지나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려다가 풍랑을 맞아 예기치 않게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주도 관리들에게 포도주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낮선 땅에 다다른 그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귀한 포도주를 바쳤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 이미 포도주가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우리나라 근대의 과일주
○ 과일주(와인) 생산의 배경
우리나라에서 과일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정부의 ‘국민주개발정책’을 내놓음으로서 포도주 산업이 국가적으로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 이때 정부 정책의 배경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가 양곡정책일환설이다. 밀주를 아무리 단속하더라도 곡식을 가지고 술을 만드니까 곡식 대신에 과일을 가지고 술을 만들어 술의 원료로 사용되는 곡식의 사용을 줄이자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둘째는 청와대만찬회 건배주설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들을 위한 만찬에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포도주로 건배를 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국내에서 포도주가 생산됨으로써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국내 와인 생산의 역사
이렇게 국가 주도적으로 과일주산업이 시작됨으로써 국내 굴지의 주류 제조업체인 해태주조, 동양맥주, 백화양조 3사가 정책에 참여하고 포도원을 조성하여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등장한 와인들이 1974년에는 해태주조에서 생산한 ‘노블 와인’, 1977년에는 동양맥주에서 ‘마주앙’, 그리고 뒤이어 진로의 ‘샤토몽블르’, 금복주의 ‘두리랑’ 대선의 ‘그랑주아’(스파클링 와인)등이 출시되어 국내 와인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시작되면서 가공용 포도원의 폐원이 시작되고 1993년 다자간 무역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다양한 포도주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 과일주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0년는 후반부터 소규모 농가나 작목반 영농조합을 기반으로 과일주 제조업체가 하나둘씩 새롭게 생기면서 생산량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해외탐방을 통한 벤치마킹과 다양한 교육을 통하여 급속하게 기술력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