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화 민족에게는 그에 걸맞는 술이 있다.
독일의 맥주,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포도주, 일본의 사케, 멕시코의 데킬라 등은 세계인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00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에게는 어떤 술이 있을까요? 세계의 명주들은 그 지방의 특성에 따라 발전 계승되어 왔습니다.
포도가 잘 되는 유럽이 포도주를 낳고, 건조한 멕시코에서는 선인장술인 데킬라가 생긴 것처럼 우리나라에는 누룩을 사용한 독특한 술이 있습니다. “전통주”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술은 크게 나누어 탁주, 약주, 소주의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을 가진 술은 역시 약주로서 산림경제, 고사십이집, 규합총서, 임원십육지 등 문헌에 나오는 술만해도 수 백 가지에 이릅니다.
애석하게도 문헌에만 전해질 뿐 이미 사라져 버린 술이 있으며, 최근에 복원되어 민속주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술들이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다양하고 화려한 우리 전통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전통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 어느 곳에나 술이 있었다. 사람이 모이며 술을 빚었고 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싹 텄다.
술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시름을 잊게 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에 술잔을 가운 데 두면 모든 恩怨은 녹아내리고 사랑과 友情이 싹트며 文化와 人種의 벽도 허물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술로써 몸을 해치고 싸움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순되는 술의 양면성은 술이 취하게 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다 술이 혼자서 하는 일이겠는가? 다만 인간이 술의 힘을 빌어 하는 일일 뿐 술은 그저 술일 뿐이다.
다만 술을 다스리는 民族과 文化는 번성하고 술에 사로잡힌 민족과 문화는 몰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술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한 문화는 술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키워 내었다.
와인, 위스키, 꼬냑, 마오타이, 테낄라 등등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銘酒들은 성공적인 문화권의 생산물인 것이다. 오랜 역사와 독창적인 문화를 가진 우리에게도 우리만이 독특한 전통술이 있었다. 그것은 地理的, 文化的遠近에 따라 西歐의 술과는 크게 다르고 중국과 일본의 술과는 비교적 유사한 점이 많다.
서양의 술과 동아시아 3국의 술을 다르게 하는 것은 누룩이다. 서양의 과실주는 물론이고 서양의 맥주나 위스키 같은 곡주도 누룩을 사용하지 않고 麥芽(엿기름)로 술을 빚는다. 누룩은 밀이나 쌀같은 곡식을 물로 반죽해서 곰팡이가 피어나도록 발효시킨 것이다.
우리의 전통술도 곰팡이를 이용하여 빚는 누룩술이다. 그렇다면 같은 누룩으로 술을 빚는 동양 3국 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본술은 쌀누룩을 사용한 술이며, 중국과 우리는 밀누룩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또, 원료는 중국이 찹쌀을 주로 쓰고 일본이 쌀만을 사용해 술을 빚는데 비해 우리는 쌀과 찹쌀, 잡곡들을 다양하게 함께 사용하여 술을 빚는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술은 지금까지 제조법이 전하는 것만도 약 300여 가지에 이른다.
전통술을 빚기 위해서는 먼저 누룩을 잘 디뎌야 한다. 통밀을 부수어 물과 함께 반죽해서 덩어리지게 하여 약 6개월간 발효시키면 속속들이 곰팡이가 핀다.
이렇게 만든 누룩과 쌀, 보리 등 곡물 원료를 한데 버무려 물과 함께 옹기독에 넣어 발효시키면 짧게는 3일, 길게는 100일 정도 후에 찌꺼기가 가라앉고 술독 표면이 맑고 노른 물이 떠오른다. 이것을 떠내면 알코올 도수 16도 전후의 약주가 된다.
남은 찌꺼기에 물을 타서 체에 걸러내면 탁주(막걸리)가 되고 소주고리에 증류해 내면 소주가 된다. 유명한 약주로는 백하주, 호산춘, 소곡주 등이 있고, 막걸리로는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정도로 진한 이화주, 산성막걸리가 유명했고, 소주로는 평양소주, 이강주, 안동소주 등이 유명했다.
이밖에도 노송의 썩은 허리에 술을 빚어 넣은 와송주, 대나무속에서 익힌 죽통주 같은 술도 있었다. 우리 전통술은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져 먹기 좋고 독특한 과실향이 난다. 또한 작은 국토에서 빚어진 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점이 남다르다.
무엇이 우리 전통술의 그러한 특성을 가져다 주었을까?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우리 조상들의 술에 대한 독특한 생각과 가양주 문화에 있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술을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 지긋한 분들은 술을 마신다고 하지 않고 술을 먹는다고 한다.
술이 음식이기 때문에 5미가 조화된 맛있는 술을 좋은 술이라 하였고 음식이기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양, 중국, 일본과 달리 역대 왕조의 금주정책으로 공업적 양조보다는 집에서 빚어 마시는 가양주 문화가 발달한 탓에 역설적으로 엄청나게 다양한 술들이 전하는 것이다.
또다른 우리 전통술의 특징은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醫食同源의 恩想은 때로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를 낳기도 하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온 “음식이 곧 가장 좋은 약”이라는 생각이 술에도 적용되어 술 자체를 약으로 쓰기도 하고 특히 술의 부원료로 생약재를 사용한 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생약제의 고유한 약효 외에도 순환기 질환과 암 등에 작용하는 전통누룩과 전통술의 기능성도 현대과학의 힘을 입어 그 과학성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우리 술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크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오히려 격식을 깨는 주법을 더 멋스러워 한다. 그래서 밤거리에는 취객의 노래와 갈짓자 걸음이 드물지 않고 대체로 그것을 너그럽게 보아 넘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주도와 술 문화가 없다고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법의 유일한 원칙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술의 주인인 한 술은 좋은 것이었다. 잔을 돌리되 세순배 이상 하는 것은 술 못먹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므로 천박하다고 보았다.
사람을 아끼는 문화,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문화가 우리 문화의 특성이듯 우리 술 문화의 특성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신 사이를 가깝게 해주는 화합과 화해의 술 문화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의와 절제속에서도 딱딱해지지 않고 마치 ‘흥에 겨워 부르는 추임새’처럼 자연스러운 파격이 있어야 멋있다 하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술은 중국술처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는다. 전통술은 일본술처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다. 와인처럼 세련되지도 않다. 보드카처럼 독하지도 않다.
그러나 과실주가 아닌데도 느껴지는 은은한 향, 자연스런 빛깔, 같은 도수라도 유난히 부드러운 느낌, 큰 차이는 아니지만 자꾸 마시다보면 알게 되는 미세한 맛이 차이, 통음후에도 두통이 없는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술은 다른 어떤 술과도 다르다.
전통술의 진면목을 알려면 현대인의 고질인 급한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당신이 히말라야의 장대함에서 느끼는 기쁨만큼이나 당신 고향집의 저녁노을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국의 전통술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술이다.
당신이 도시의 화려함과 편리함속에서 살더라도 가끔 자연으로 나아가 신성한 공기와 물을 마시기를 즐겨한다면 한국 전통술은 당신에게 참으로 적합한 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이 美食家이고 아직 제대로 빚은 전통술을 먹어보지 못했다면 꼭 한 번 먹어 보아야 한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좋다. 왜냐하면 한국의 전통술은 “맛이 있고(存), 맛이 좋은(好)” 또 하나의 음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