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전라도 > 전라남도 강진 |
분류 | 발효음식 > 장(醬).젓갈 |
자료보유 | 전라남도 강진군 다산명가 |
자료기록 | 강진 해남 윤씨 윤종진 가문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뽕잎장아찌 | |
2 | 약선된장 | |
3 | 미나리김치 | |
4 | 콜라비장아찌 | |
5 | 명월초장아찌 | |
6 | 여주장아찌 | |
7 | 전복장아찌 | |
8 | 머위대장아찌 | |
9 | 풋마늘홍갓김치 | |
10 | 볶음고추장 | - |
11 | 동백하액젓 | |
다산의 막내 제자였던 윤종진의 후손인 윤동환은 어린 시절 초당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고, 어느 날 초당을 찾은 외국인이 다산에 관해 묻기에 대답을 잘하고 싶어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이 오랜 인연의 시초가 되었다. 대학 때는 본격적으로 다산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그의 학문과 인격에 심취했다.
해남 윤씨 가문의 집 입구에는 널찍한 찻집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입구에는 ‘다신계(茶信契)’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다신계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에 인연을 맺은 18명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모임으로 해마다 모여 햇차를 만들어 마시고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이 같은 다신계의 뜻과 의미를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그는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찻잎을 따던 나무에서 해마다 찻잎을 거둬 첫물차를 내리고 이를 다산의 영정 앞에 올린다. 남은 차는 다산의 후손에게 보냄으로써 다신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신의(信義)'를 오늘날까지 지켜가고 있다.
평생을 다산의 연구에 매진하다 보니 <삶 따라 자취 따라 다산 정약용>, <다산의 생애와 사상> 등 관련 저서들을 다수 펴냈다. 다산이 꿈꾸었던 목민관(牧民官)을 실천하기 위해 강진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야망보다는 민중의 삶을 보살피고자 선택한 길이었기에 한 번으로 만족했다. 현재는 사단법인 다산문화진흥원을 이끌며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행정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광주전남발전연구원의 선임 연구원 및 조선대, 동신대 외래교수로 재직 중에 윤동환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국령애는 남편 못지않은 열렬한 다산 연구가이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다산의 의서로 알려진 <마과회통>으로, 당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무서운 질병의 하나였던 마진(痲疹, 홍역)의 치료법을 상세히 소개한 책이다.
우리에겐 실학자로만 알려진 다산이지만 실제로 한의학에도 매우 능통했다. 그는 의원을 미천하게 여겼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술을 펼치지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이 질병에 고통받으면 구두로나 편지의 말미에 간단한 처방을 알려 주곤 했다. 처방전의 대부분은 주변에 많이 나는 약초와 열매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기에 가난한 백성들도 누구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던 다산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국령애는 다산이 남긴 자료들을 근거로 현대인에게 필요한 자연 밥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약초 가루다. 다산의 다양한 기록들에서 항균 작용이 뛰어나다고 적은 약초들을 직접 말려 가루를 낸 것인데, 이것으로 장아찌를 담그니 저장성이 좋아지고 양념에 더하면 소화가 편하고 맛이 깔끔해졌다. 또 다산이 초당에 방죽을 만들어 직접 키워 먹었을 만큼 좋아했던 채소인 미나리로 김치를 담그고, 된장을 만들 때 전복 껍데기와 청미래 뿌리를 넣고 달여 해독 작용을 더하기도 했다.
강진 해남 윤씨 가문에서 담그는 모든 장아찌에는 약초 가루가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실제로 강진 해남 윤씨 가문의 장아찌들은 3~4년이 지나도 처음 담갔을 때의 아삭한 식감을 그대로 유지해 약초 가루의 효능을 입증하고 있다. 또 약초 가루를 일반 음식의 양념에 넣으면 소화흡수력을 높이고 정화력이 있어 잡맛을 없애는 효과도 있다.
담양의 친정에서 익힌 미각과 내림 손맛을 그대로 지니고 강진으로 시집온 국령애는 풍부한 해산물 등 사용하는 식재료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음식 솜씨도 날로 깊어지고 있다. 남도에서의 오랜 유배 생활과 비슷한 시기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형님 정약전(1758년~1816년)과의 교류를 통해 식재료에 대한 다산의 식견이 확장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국령애의 친정 할머니 문부동은 대찬 여장부로, 특히 밥상 예절을 엄하게 가르쳤다. 혼자 식사할 때도 상을 똑바로 놓고 찬을 제대로 갖추고 먹어야지 무엇 하나라도 대충 할라치면 호되게 꾸짖으셨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가 손님상을 직접 차리도록 시키기에 어머니가 차린 그대로 냈더니 손님이 돌아간 후 할머니께서 회초리를 들었다. “네 어미가 놨던 상을 그대로 낼 것이 아니라, 텃밭에 널린 것이 반찬인데 한 가지라도 네가 직접 상에 올렸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린 마음에 너무 억울했지만 그때의 가르침이 지금까지도 밥상을 차리는 기본 심성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할머니는 음식 장만을 할 때면 옆에서 거들며 손으로 직접 감각을 익히도록 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어릴 적부터 익혀온 기본이 없었다면 시집와서도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국령애는 믿는다. 그는 식품영양학이나 자연과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선조들의 대를 이어 내려온 손맛에 살면서 익혀온 감각과 경험, 직접 자료를 찾아보는 열정과 노력을 더하여 우리의 전통 음식을 배워 나가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과학은 항상 어떠한 것을 토대로 조금씩 살을 붙여 가며 진화하는 것이고, 전통 음식 또한 옛것만을 고집하며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며 완성되는 것이다.
윤동환은 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 집안의 가훈도 중요하지만 그 가문에 어떠한 음식이 있다는 것도 자존감을 높여 주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국령애는 이 같은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강진 해남 윤씨 가문의 내림 음식과 다산의 지혜를 빌린 건강한 무공해 먹거리로 새로운 음식 문화를 이끌고 있다.
또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영감을 얻어 현재 <목민식서(牧民食書)>를 집필 중인데, 행간에 담긴 선생의 높은 뜻을 지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라 믿는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다산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바람이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해남 윤씨 가문이 운영하는 다산명가는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년~1836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년~1671년)를 배출한 해남 윤씨가 다산의 외가일 뿐 아니라,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에게 초당을 내주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그의 제자를 자처했던 윤문거였다.
다산의 실학을 집대성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한 공간으로 잘 알려진 다산초당은 본래 윤문거의 아버지인 윤단의 산정(山亭)이었고, 다산은 18년간의 유배 생활 중 10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다산명가는 이 같은 해남 윤씨의 후손이자 다산초당 입구에 자리해 그 의미를 더한다.
다산은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강진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당과 동암, 서재의 지붕은 새로 이엉을 얹었느냐"고 물을 만큼 초당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또한 초당이 자리한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정약용의 호도 이곳에서 유래했다.
다산의 막내 제자였던 윤종진의 후손인 윤동환은 조상들의 집터에 머물며 평생을 다산 연구에 쏟았고, 그의 아내인 국령애는 다산의 의서인 <마과회통(麻科會通)>에 근거하여 약초 가루를 만들고 장아찌를 담근다. 다산은 그들의 정신적 스승이자 삶의 터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