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경상도 > 경상북도 안동시 |
분류 | 발효음식 > 장아찌 |
자료보유 | 경상북도 안동시 지례예술촌 |
자료기록 | 안동 의성 김씨 김방걸 종가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부추장아찌 | - |
2 | 깻잎김치 | |
3 | 즙장 | |
4 | 당귀뿌리장아찌 | |
5 | 곤짠지 | |
6 | 당귀잎장아찌 | |
7 | 깻잎김치 | |
8 | 생대하배추속박이 | |
9 | 비비추장아찌 | |
10 | 더덕장아찌 | |
11 | 두릅장아찌 | |
12 | 참죽장아찌 | |
안동 도산면이 친정인 이순희 종부는 퇴계 이황(1501년∼1570년)의 후손이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 종가의 며느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故 권영임 시어머니가 오랜 투병 생활 중이던 터라 결혼과 함께 부엌살림을 맡게 되었다. 처녀 시절에 살림은커녕 음식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병 수발에 시아버지, 시조부님까지 모시려니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고되기만 했지만,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는 고생에도 물러졌다며 호탕하게 웃어넘긴다.
이순희 종부는 시댁과 친정이 한 지역의 같은 음식문화권이어서 안동 의성 김씨 종가의 내림 음식을 큰 거부감 없이 배울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오랜 투병 생활로 병약했지만 살림이 서툰 이순희 종부의 옆에서 집안의 맛과 정신을 가르쳐 주셨다. 시어머니의 가르침 중 “음식의 맛과 정성도 중요하지만, 항상 담음새(마무리)를 생각하고 만들어라.” 하신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또한 시어머니는 집안의 내림 음식을 윗대부터 눈으로 보고 배워 왔기 때문에 특별히 ‘내 거’라는 주장을 하지 않고, 시집온 지 몇 해 안 된 며느리가 제안한 재료나 조리법의 변화에 대해 유감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이 댁의 종부들은 옛것은 옛것대로 그렇게 만든 배경과 이유가 있고 요즘 것은 요즘의 환경과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진정한 종가 음식의 가치는 음식과 그것을 먹는 사람을 대하는 정성과 태도에 있다는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안동 의성 김씨 종가는 집안 어르신들에 대한 효를 기본으로 하기에 주로 무른 음식을 내었다고 한다. 조리법의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놓지 않았던 것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생활에서 옛 전통을 이어 간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생각되지만, 이순희 종부는 근본만 마음에 새긴다면 오히려 간단하다며 그 합리성을 강조한다. 다른 지역의 제사는 지지고 볶은 다양한 음식을 올리지만, 안동 지역에선 생고기를 썰어 올리고 전은 따로 부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전통 방식의 제사가 더 간편하고 음식이 남지 않아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종가의 큰살림을 유지하는 비결도 결국은 간소한 삶이라고 강조한다. 일 년에 열 번이 넘는 집안 제사를 모시려면 평소에 알뜰하게 생활해야 살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깻잎김치나 당귀잎장아찌 등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조리법과 재료를 간소화하면서도 음식은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 이순희 종부는 자녀들에게도 “항상 뭐든지 줄여라”, “필요 없는 살림은 쌓아 두지 말라”고 당부한다.
종부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무겁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삶이지만, 그저 삶의 한 가지 형태라 여기면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노력과 희생을 통해 지금껏 종가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이순희 종부는 늘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다. 여성의 사회생활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직 생활을 그만둔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다시 선택의 상황에 놓여도 여전히 종부의 삶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경험이 부족해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가 아쉬워 좀 더 제대로 된 종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란다.
이순희 종부의 며느리는 전통 음식을 전공했다. 덕분에 종가 음식의 전수는 따로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며느리가 아이를 돌보느라 여력이 없지만, 막상 음식을 시켜 보면 자신보다 더 솜씨가 좋다며 종부는 흐뭇해한다. 훗날 여력이 있을 때 며느리에게 종가의 내림 음식을 차근차근 가르칠 생각이다. 물론 음식의 맛도 중요하지만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종부로서의 철학과 정성스러운 자세다.
지례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원길 종손은 197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1983년 임하댐 건설로 고향 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선대의 유적인 종택과 지산서당 등을 뒷산으로 옮겨 예술창작마을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종손의 결정이었다.
그는 1988년 지례예술촌의 문을 열고 지금껏 고택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종가의 제사 일정을 공개해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고택 체험과 고택 음악회 등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체험 행사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덕분에 2007년 ‘장한 한국인상’을 받고 문화훈장(옥관)을 수훈하는 등 전통 문화의 수호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또한 1974년 <개안-開眼>을 시작으로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들꽃다발> 등 다수의 시집을 내면서 문인으로서의 활동도 꾸준하다. 특히 2002년에는 옛 선비들의 짤막한 우스개를 모아서 엮은 책 <안동의 해학>을 통해, 명분과 이념을 중시하는 안동 사람들의 순박하고 재치 넘치는 새로운 일면을 대중에게 알렸다.
그의 시에서는 고향인 지례마을과 안동, 전통의 기품과 아름다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2009년에 발표한 시 ‘아내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한다’에는 자신과 결혼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종부의 길을 걷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지례마을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숙종 때 대사성을 지내기도 했던 지촌(芝村) 김방걸(1623년~1695년)과 그 형제들의 자손이 340여 년 동안 함께 살아온 전형적인 선비 마을이다. 김방걸은 현종 1년(1660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게 됐는데, 이후 지례마을로 분가하여 호를 지촌이라 하고 이곳의 입향조가 된다.
그가 지례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도연(지명,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에 하나뿐인 도연폭포가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남)에 은거했던 아버지 표은(瓢隱) 김시온(1598년~1669년)의 영향이 컸다. 김시온은 조선이 전쟁에 패하자 청에 항거해 과거를 포기하고 송나라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딴 도연에 은거하며 평생 독서와 학문을 가까이하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아버지에게 정신적 영향을 받았던 김방걸은 도연에서 10리 정도 상류에 자리한 지례마을에 집을 짓고 자연과 벗 삼은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청렴한 생활을 강조해, 한때 영암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땐 수레에 국화꽃 화분 하나뿐이었다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는 전한다. 그가 58세 되던 해 남인 세력이 경신출척(庚申黜陟)을 당할 때 벼슬을 그만두고 지례에 돌아와 9년을 지냈는데, 그때 지은 유명한 시 ‘무언(無言)’에는 은둔하여 조용히 자연을 즐기는 자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큰사랑방 문 위에는 ‘무언재(無言齊)’라는 현판을 걸어 세속적 삶을 멀리하고자 했던 지촌의 뜻을 되새기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일곱 번이나 벼슬을 사양할 만큼 은거의 삶을 살았지만,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탓에 일흔의 나이에 결국 다시 조정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남인들의 실권(失權)과 함께 결국 전라도에 유배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일로 지례마을에서는 아무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불리는 중재 김황(1896년∼1978년)과 독립운동가인 백하 김대락(1845년~1914년), 지례에 머물면서도 그 명성이 높았던 정와 김대진, 난곡 김강한, 장암 김시락, 수산 김병종 등의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지산서당 한편에는 굵은 참나무에 새긴 ‘유어예(游於藝)’라는 글귀가 눈에 띄는데, 이는 논어(論語)의 “지어도(志於道) 거어덕(據於德) 의어인(依於仁) 유어예(游於藝)”에서 따온 말이다. 즉 도에 뜻을 세우고 덕을 근본으로 하며 인을 기준으로 삼아 예를 자유자재로 즐기라는 뜻으로, 삶에 있어 예술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 말이다. 이는 현재 지례마을이 추구하는 이상향과도 연결되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안동 지례예술촌에는 정겨운 돌담에 둘러싸인 전통 방식의 장독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장독대는 진흙으로 바닥을 다지고, 배수(排水)를 위한 굵은 모래와 자갈을 깔고 소금을 뿌리면 더욱 단단해진다. 그 위에 숯가루를 뿌리고 굵은 모래와 소금을 번갈아 깔고 다지는 작업을 반복한 후 자갈을 덮어 마무리한다. 장독대의 바닥을 다지는 데 공을 들이는 이유는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습기가 차지 않고 잡균이 번식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선조들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종가 음식의 바탕이 되는 것이 장맛인 만큼 이순희 종부는 장독대 주변을 늘 깨끗이 하고 정갈하게 관리한다. 또한 매년 장을 담글 때마다 간을 잘 맞추고, 혹여 조금이라도 변할라치면 바로 처방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