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 아시아 > 전라도 > 전라북도 진안 |
분류 | 발효음식 > 장아찌 |
자료보유 | 전라남도 진안군 괴정고택 |
자료기록 | 진안 광산 김씨 김중정 종가 |
제작년도 | 2014 |
제작기관 | 세계김치연구소 |
레시피 기초 | |
1 | 콩잎된장장아찌찜 | |
2 | 배추김치 | |
3 | (빨간)동치미 | |
4 | 총각김치 | |
5 | 고추장아찌 | - |
6 | 마늘종장아찌 | |
7 | 파김치 | |
8 | 감장아찌 | |
9 | 부추김치 | |
10 | 양파장아찌 | |
11 | 열무얼갈이김치 | |
12 | 고들빼기김치 | |
13 | 무된장장아찌 | |
14 | 갓김치 | |
진안 광산 김씨 종가를 지키고 있는 고명딸 김미옥은 특별한 내림 솜씨를 물려받았다. 조선 중기 문신인 정온(1569년~1641년)의 후손인 외할머니(정판귀)가 궁궐의 귀한 음식을 만드는 최고 수라 상궁의 비법을 전수받은 덕분이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온을 특별히 아꼈던 임금은 수라 상궁을 그의 집에 보내어 음식을 만들게 했는데, 이를 통해 화려한 궁궐의 음식이 외할머니의 집안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음식을 배운 친정어머니 역시 궁중의 비법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손맛이 깊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김미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외출하신 사이 어깨 너머로 배웠던 흑임자인절미를 한번 만들어 봤는데, 어린 나이에도 음식 솜씨가 남달라 집안 어른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가정환경 덕에 그녀는 자라면서 궁중의 요리 비법을 전수받은 외할머니와 전라도 종가의 내림 음식에 뛰어난 할머니, 경상도 출신이라 이웃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음식 종류를 선보였던 어머니에게 골고루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충청도와 서울에 오랜 기간 머물며 각 지역의 모든 조리법을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했던 그녀는 병드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진안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만큼 며느리보다는 자신이 모시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아 병 수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투병 생활 내내 어머니는 딸이 해주는 음식만 찾으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임종 후 지금껏 홀로 종가를 지키고 있는 그녀는 “집안의 무거운 짐은 나 홀로 지면 족하다.”며 수줍게 웃는다. 그녀에게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결정체다.
누나 김미옥과의 우애가 남달랐던 막내 종손 김혁수는 한동안 외면당했던 고택을 복원하며 종가의 문화를 지켜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낡은 옛집에서 홀로 지내는 누나가 안쓰러워 수리를 시작했고, 지금은 종가가 보유한 특별한 문화유산을 잘 복원하여 후대에 소중한 자산으로 보전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현재 대학에서 관광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이미 중국인 유학생을 비롯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제자들의 고택 체험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어머니와 누나가 해주는 최고급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진 그는 고택뿐 아니라 종가의 음식도 다음 세대로 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미료와 인스턴트에 익숙해진 요즘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테지만, 종가의 음식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맛의 문화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때문에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누나를 적극 도와서 자신이 먹고 자란 음식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 종가의 공간과 조리 기구
광산 김씨 종중이 소유 · 관리하고 있는 와룡암은 현재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중종 1년(1506년) 내금위장을 지낸 김중정(1602년~1700년)이 당쟁으로 얼룩진 조정을 등지고 낙향하여 암자를 세웠던 곳으로, 당시 전라북도에는 서당이 많지 않아 이곳에서 수백 명의 유생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암반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마루집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문을 펼치면 경연장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그 앞을 휘돌아 나가는 섬진강 줄기가 아름다워 시 한 소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곳이다. 이 종가의 종손들도 어린 시절 이곳을 찾아 멋스러운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와룡암을 마주한 자리에 위치한 주천서원은 김중정을 비롯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고 매년 9월 보름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홍살문, 외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주천서원은 원래 서원이 아닌 사원으로, 1924년 유림과 광산 김씨 문중의 도움으로 주천사를 세웠다가 1975년 성균관장의 인준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400년이 넘은 터에 지은 지 150여 년이 됐다는 진안 광산 김씨 종가는 위엄 있는 종가의 이미지와 달리 소박한 외관이 마치 정겨운 시골 외갓집을 떠올리게 한다. 김중정 종가의 종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살며 이웃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작은 것일지라도 함께 나누며 생활했다. 그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한 이념 논쟁 속에서도 오히려 주민들의 보호를 받아 지금껏 종가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김미옥에 따르면 신식 교육을 받았던 아버지는 늘 소박한 옷차림으로 마을 사람들과 서슴없이 어울렸다. 자식들에게도 마을 어른들께 늘 깍듯하게 인사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경상도에서 시집 온 아내와의 입맛 차이로 힘들 법도 했건만 반찬 투정 한번 안 하던 소탈한 아버지였다. 그 때문에 친정에서 몸종을 둘이나 데리고 올 만큼 부잣집의 귀한 딸이었던 어머니는 시집온 후에는 경상도 사투리도 잘 쓰지 않을 만큼 종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장을 담그거나 김장을 하면 이웃과 먼저 나눌 만큼 인정도 넉넉했다고 한다.
진안 광산 김씨 종가의 김치광은 그 역사만 무려 150여 년에 이른다. 보통 김치광은 바깥에 자리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독특하게 부엌 뒤편에 붙어 있다. 산골의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깊은 것과 조금 덜 깊은 것 등 총 7개의 독이 묻혀 있다. 김장철이면 배추김치를 비롯해 동치미와 파김치, 갓김치, 총각김치, 고들빼기김치 등을 독에 담아 이곳에 묻었다. 김치광에 묻어둔 김칫독을 씻을 때는 빈 독에 물을 가득 부어 퍼내기를 반복한 후 마른행주로 물기를 깨끗이 닦아 마무리한다.
진안 광산 김씨 종가의 곡식 창고는 지붕을 제외하고 바닥과 사방이 모두 송판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크기가 상당해 종가의 옛 살림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김미옥에 따르면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으나 예전에는 100마지기 이상 지었다고 한다. 달 밝은 밤 곡식 창고에 사다리를 놓고 머슴들이 줄지어 “하나요, 둘이요~” 세면서 탈곡한 낱알을 밤새도록 가득 부었다고 한다.
송판으로 만든 창고에 곡식을 보관하면 통풍이 잘 되어 썩지 않고 잘 짜인 마룻바닥은 곡식이 새지 않아,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구조이다. 낱알로 보관해 둔 쌀은 밥을 할 때마다 바로 절구에 찧어 가마솥에 안치므로 맛 또한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