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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2. 氣味論 이론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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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藥食同源 사상의 형성배경

중국과 지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매우 빈번했기에 사회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중 식생활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국음식문화의 가치 체계가 우리나라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렵 채집을 통해 삶을 영위한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상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고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신(神)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으며 정령(精靈)에게 기도함으로써 신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수렵채집의 원시사회가 붕괴되고 농경에 의한 정착생활로 접어들면서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萬物有靈” 사상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철학이 발달하게 되고, 동·서양에서는 氣, 道, 太極 등의 일원론적 사상이 형성되어 陰陽五行學設이 중국을 중심으로 태동하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의사와 요리사가 완전히 다른 직업이고, 약품과 식품도 완전히 다른 상품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요리사가 의사였으며, 식품과 약품이 구별되지 않은 식품의 식용과정에서 약품의 발견과 사용이 이루어져 醫와 食은 같은 원류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藥의 神과 農業의 神인 神農氏는 인간에게 약효가 있는 식품을 골라 알려주었고, 요리의 神인 동시에 湯藥의 神인 은나라 재상 伊尹은 여러 가지 藥物을 배합하여 물에 달린 湯藥을 치료에 이용했다.

가장 오래된 의서인 ≪神農本草經≫에 365종의 재료를 上·中·下로 나누어 上藥은 오래 먹어도 독이 없는 상식하는 식품 즉, 日常食이라 하였고, 中藥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오래 쓰이는 식품 즉, 補藥이며, 下藥은 급성병에 쓰이고 오래 쓰지 못하는 毒性食品 즉, 치료약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미 이때부터 藥食同源의 개념이 중국인의 일상 식생활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陰陽五行思想은 모든 사물의 현상은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속성을 가진 陰과 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종류의 氣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우주의 기초를 이루는 木·火·土·金·水가 생겨 相生, 相剋의 관계가 성립되고,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천지만물이 생겨난다는 우주관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식품도 음양오행의 속성에 따라 분류되어졌다. 즉, 陰陽哲學은 식품구조를 二分 法核分裂의 과정으로 인식하였다. 예를 들어, 음식도 마시는 飮(陽)과 食(陰), 主食(陽)과 副食(陰), 肉類(陽)와 穀類(陰)등과 같이 상대적이고 대립적 개념으로 분류했다.

五行관념은 식품구조를 五穀(밀, 콩, 조, 참깨, 기장 등)과 五畜(양, 닭, 소, 개, 돼지)으로, 맛과 香도 五味(신 것, 쓴 것, 단 것, 매운 것, 짠것)와 五香(산초향, 팔각향, 계피향, 진피향, 정향)으로 파악했고 중국음식문화에서 대립적 관계인 이런 陰陽관계를 儒家의 中庸哲學이 조화와 균형의 관계로 승화시켰다.

유교의 원리는 인내, 평화, 중용, 노인과 학자에 대한 존경심, 神이 아닌 人問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는 인본주의 등의 덕목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는 지배층 통치수단인 엘리트 중심의 규범으로, 도덕성의 원리보다 상벌에 의해 규제를 받는 서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대중을 중심으로 유교적 규범에 가장 강하게 반기를 든 道敎가 탄생하였다. 道란 자연주의적 우주론과 자 연계의 정령에 대한 믿음의 표현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일반대중 뿐만 아니라 노자를 중심으로 사대부도 공유하게 되었다.

이 학파는 초기에는 유교가 거부한 정령숭배, 연금술, 不老不死의 藥과 神仙이 산다는 섬에 대한 추구, 중국의 초기 의술, 자생적이거나 인도에서 수입된 일반적인 神秘 主義가 포함되면서 불로장생의 생명력과 초인적 힘을 얻을 수 있는 神仙術을 바탕으로 導氣法, 吸精法, 服餌法 등의 구체적인 양생법을 제시하면서 中國醫家나 本草家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식생활에서는 神仙食을 완전히 찾지 못한 가운데 강장의 효과가 있는 제 2의 神仙食을 계속 추구하면서 藥效가 있는 특수재료와 향신료 등을 요리에 많이 사용하여 약식동원에 근거한 오늘날의 중국음식문화를 낳게 되었다.

중국과 머리를 맞대고 있던 우리나라도 서포강 유적인 동물의 이, 뼈, 뿔로 만든 사람 및 동물 형상 등을 통해 이미 원시시대에 영혼관을 갖고 있어 조상숭배, 자연숭배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BC 3,600년 경의 유적지 돌무덤과 무산읍과 경남 김해 무언동 등의 점뼈의 출토는 종교적 권위자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어 정령사상이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민족일수록 자신들의 민족 신화를 갖고 있는데 고대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그 민족의 종교관, 세계관 등의 사상과 역사적 체험이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우리나라도 최초의 국가 사회인 고조선의 단군신화라는 민족신화를 통해 그 시대의 종교사상, 정치사상, 사회사상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종교는 仙敎로 주요 사상은 弘益人間 정신이었다. 즉, 우주질서를 하늘과 땅의 二元論으로 보지 않고 하늘과 땅, 사람이라는 三元論으로 보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桓雄이 熊女와 결혼하여 檀君을 낳은 신화내용은 하늘과 땅을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 융합, 조화의 존재로 파악하는 正反合의 소박한 辨證法이기도 하다.

仙敎는 하늘을 가장 높은 神으로 숭배하며 선교의 중요 인물인 단군을 포함하여 仙人이라 하였고, 이 仙人을 神仙이라 하였다. 이러한 신선 사상은 훗날 중국 도가의 신선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군신화를 통해 우리는 선교의 하늘, 땅, 인간 중심의 三位一體思想(弘益人間), 天孫族이라는 하늘 숭배사상, 쑥과 마늘을 중요 약재로 오랫동안 전승 사용해온 의학사상, 단군에 의한 고조선 시대(BC 2300여년부터 BC 2세기 말) 以前의 桓因(일만년전 이전의 구석기와 중석기 시대), 桓雄(BC 일만년 전 전후부터 BC 6천여 년 전까지), 환웅과 웅녀의 결혼(BC 6000천년전부터 BC 2300년전까지) 시대의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건국 신화를 통해 우리의 식생활문화에는 국가사회 이전의 시대부터 이미 藥食同源의 개념이 깃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건강을 위한 藥과 食品의 종류, 그리고 食用法을 중국으로부터 받아 들였다.

그러나 점차로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후, 풍토가 다르고 산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중국의 약이나 식품 가운데 우리 산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이들 식품의 효능과 食用法을 연구해 그 결과를 묶어 高麗 高宗 때 「鄕藥救急方」을 발간하였다.

또한 체제를 갖추어 고구려 영류왕(624)때 들어온 도교는 우리의 전통신앙, 또는 불교와 융합되어 발전하면서 조선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친다.

도교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의 영향으로 약세에 몰렸으나 예종 5년(1110년)에 北宋의 도사에 의해 국가 재난을 막기 위한 제단으로 福源觀이란 道觀을 왕궁에 세웠고 守庚申宴會, 주술, 부적, 탕약, 음복 등의 방법으로 도교신앙이 민중에 보급되었다.

유교가 건국이념인 조선조에서도 도교적 풍습이 널리 유행 되었음이 東國通鑑, 經國大典, 龍飛御天歌 등에 기록되어 있고, 老子의 道德經을 비롯한 수만은 道敎書籍과 이들의 諺解書, 註解書도 탄생되어 활발한 유교연구와 더불어 도교 연구도 함께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교의 事親孝養사상과 불로장생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도교의 신선술에서 출발한 양생학이 융합되어 생긴 사회적 분위기에 의한 것이었다.

사대부는 유학공부와 함께 事親에 필요한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어 元代의 「山居四要」 「壽親養老新書」등을 복간하였고, 明代의 胡文煥이 여러 양생서를 집대성한 「修養叢書」가 儒林界에 보급되었다.

또한 광혜군 12년(1620년) 에 李昌庭은 호문환이 편찬한 「수양총서」에 중복되거나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修養叢書類集」이라는 養生書를 출판한다.

특히 퇴계는 도교사상을 그의 학설인 「心性論」에 반영시켜「活人心方」을 엮어 장생을 실천했으며 선조때부터는 도교적인 「丹學派」가 생겨 유학연구 외에 仙丹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연구에 힘입어 조선조에서는 흉년이 들면 도교의 신선술에서 나타나는 吸穀法을 도입, 응용한 구황식 개발이 이루어져 「救荒撮要」(1554년), 「救荒補貴方」(1660년) 등의 책이 간행되었다.

조선시대의 활발한 鄕約 및 救荒食品의 연구보급은 음식에도 약식동원의 관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약효가 있는 식품이 음식에 자연스럽게 가미되었으며 구황식이 평상식으로 전환되어 우리의 고유한 식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식생활 문화는 조선조 후기의 성리학의 영향으로 전래전통이 단절되어 음식문화의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러서 는 한국사회가 산업사회로 매진하면서 우리음식문화의 정신적 기반은 거의 소멸된 채, 약식동원의 개념이 건강식품을 포함한 기능성 식품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접하게 되었으나 그 활용에는 잘못된 해석으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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