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半農半禪 힘써 일하고 이웃과 나누고
좋은 옷, 맛있는 음식. 편안한 잠자리, 세속에 대한 욕심을 지닌채 도를 얻을 수는 없다. 욕심을 적게 가지고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의 삶을 산다면 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백장이 정한 선원의 노동 규약은 참선수행과 농사일은 하나라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한국에 이르러 농사일과 참선수행을 함께하라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수행으로 정착되었다. 낮에 힘써 일하고 밤에 더욱 힘써 정진하는 수행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백양사 주지를 지낸 만암 스님(曼庵宗憲, 1876~1956) 은 본사 주지를 수십 년간 지내셨지만 항상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하시며 한시라도 승가 본연의 풍모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새벽부터 언제나 가사와 장삼을 갖추고 곧은 자세로 좌선삼매에 들었다.
또 백양사 불사와 사중 살림을 신도들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스님들로 하여금 벌을 길러 꿀을 수확하고, 대바구니나 대방석을 만들고 숯을 굽게 하여 그 이익금으로 불사를 했다. 전국 사찰 중에서 가장 살림살이 형편이 좋지 않은 백양사였지만 흉년이 들 때면 항상 어려운 주민들을 도왔다.
인근 마을이 굶주리면 절의 양식을 나누어주고 대중 스님들은 풀죽을 쑤어 먹으면서 배고픔에 동참했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을 돕는 가운데서도 일정한 규범이 있었다.
사중의 논 가운데 있는 자갈을 치우게 한다든지 산에 감이나 비자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게 하고는 품삯을 지불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중에 있는 연못도 매년 인근 주민을 불러 수리하게 하고는 그 대가로 곡식을 나눠주어 거저 얻어먹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큰 절 가까이 청량원이라는 양로원을 세우는 등 복지사업을 전개함은 물론 교육사업을 전개해 독립운동의 동량을 길러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불교계는 만암스님을 새로운 종단의 가장 큰 어른으로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