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스님과 젊고 건장한 두 스님이 양념 구입 차 강릉으로 떠나고 나머지 스님들은 무우 배추를 뽑은 뒤 각자의 소질대로 일에 열중했다.
무우 구덩이를 파고 배추를 묻기 위해 골을 파는 일은 주로 소장스님들이 하고 시래기를 가리고 엮는 일은 노장스님들이 맡고 배추를 절이고 무우를 씻는 일은 장년스님들이 담당했다. 배추 뿌리와 감자를 삶은 사이참을 먹으면서 부지런히들 했다. 해는 짧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차가왔다.”
* 1970년대 한국 선방의 모습을 담은 지허 스님의「선방일기」
불교의 정신이 깊숙하게 생활화되면서 육식을 피하고 나물과 채소를 즐겨 먹어온 한반도의 역사는 한민족의 몸까지 바꿔놓았다. 세상에서 손꼽는 채식민족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창자가 가장 긴 민족이 된 것이다. 섬유질을 남달리 많이 소화(消化)시켜온 덕분이다.
김치는 고도로 발달한 발효음식으로 지역과 기후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겨울철의 김장김치는 장기간 보존하여 먹지만 다른 계절에는 그 때 나는 채소로 만들어서 먹기 때문에 계절마다 김치의 특색이 뚜렷하고 지역적 특색이 강하다.
김치가 가장 맛있는 때는 막 담은 새 김치와 버금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푹 익은 김치다. 땅을 깊이 파서 항아리를 묻고 지붕을 씌워 해를 직접 받지 않게 보관하면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어 김치 발효와 보관에 유리하다.
만들고 바로 먹어 재료의 풋내가 살아있는 김치는 ‘겉절이’라 하고 반대로 오래 저장했다 먹기 위해 만든 것을 ‘묵은지’라고 한다. 묵은지는 오래 보관하기 위해 일부러 양념을 적게하여 만든다. 김치는 가장 보편적인 반찬이지만 맛있게 담그는 방법이 쉽지 않다.
사람의 정성과 솜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후와 토양에서 자란 채소류와 산 속의 맑은 물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치는 사찰의 부식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사찰음식연구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절에서 담그는 김치 종류만 48종에 이른다. 배추, 무는 물론 고들빼기, 가지, 갓, 돌미나리, 도라지 등 다양한 채소를 김치 재료로 활용했다. 일반가정에서 담그는 종류보다 훨씬 많다.
김치를 대량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김장은 겨울을 맞이하는 사찰의 큰 행사다. 젓갈류, 파, 마늘을 쓰지 않는 사찰김치는 일반 가정 김치보다 비릿한 냄새도 없고 담백하고 독특한 맛이 있다.
오신채에 속하는 파, 마늘, 부추 등을 넣지 않고 소금, 고춧가루, 생강을 양념으로 많이 쓴다. 부재료로 갓, 미나리, 청각, 당근, 배 등을 넣기도 한다.
또 각 사찰에서 발달한 장류도 한 몫을 차지한다. ‘되간장’ 이라 하여 고추간장, 버섯간장, 다시마간장, 감초간장 등의 향을 지닌 간장이 첨가되어 맛을 돋운다.
♣ 텅 빈 충만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차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 법정스님의「 텅 빈 충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