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의 사적기는 다수 전해지고 있다. 1681년(숙종 7)에 조종저趙宗著가 지은 「직지사사적비」, 1775년정조 즉위 급고자汲古子 수우守愚가 지은 「경상도금산군황악산직지사사적」, 1824년(순조 24) 저자 미상의「직지사사적」, 1928년「직지사연혁」등이다.
이 중 급고자의 사적기가 충실하고 합리적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초창初創은 성주산 무염 無染의 제자인 능여 能如가 황악산에 머물고 있을 때 태조 왕건이 동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움을 청하자 능여가 도움을 주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후에 태조의 경제적 지원으로 직지사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명종대에는 임민비林民底가「대장당기」를 지었고, 그 비편의 탁본이『대동금석서』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 대장경이 봉안된 사실을 알수 있다. 조선 시기에는 1399년 정종의 어태御胎가 직지사 북봉에 안치되면서 중창된 바 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자, 유골을 이곳에 모셔와 석종부도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7세기 후반 정시한의『산중일기』에도 직지사에 팔상전의 이층누각을 짓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고 있다.
18세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추담관징秋潭琯澄, 제산정원露山淨圓, 퇴운원일退雲圓日 등 고승의 활동이 보인다. 1911년에는 일제 사찰령에 따른 사법 제정 시 해인사 말사로 편입되었고, 1958년 녹원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에는 옛 사격을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 중창이 진행되었다.
이상에서 직지사는 신라 말 선종 사원에서 출발하여 고려, 조선 시기를 거쳐 그 법등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한 고찰임을 알 수 있다.
* 한기문 경북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