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억불정책에 따라 승려의 사회적 활동은 물론 승단의 존립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사원전이 지급되는 국가공인 사찰은 태종대 242사, 세종대 36사만이 남게 되었다. 이로써 공인 사원 수와 승려, 사원전 등은 고려에 비해 대략 1/10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성종대 도첩제 폐지, 연산군대 선교양종과 승과 철폐, 명종대 선교양종과 승과가 부활하였지만 일시적이었다. 임진,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불교교단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직접 전쟁에 나서고 전후의 민심 수습에 적극적이었다.
국가에서도 승려들에게 승직과 승계를 부여하고 승병을 조직하여 산성 수호의 임무를 부과하였다. 점차 승역 부담이 커지자 영조대 승려 上番制 대신 상근하는 승려를 두고 그들의 제반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義僧防番錢制로 개편하였다.
이 역시 부담이 커서 還俗 승려가 늘고 사원에서 契를 조직하거나 수공업을 발전시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西山과 浮休 문하의 제자들이 양대 문파를 이루었다. 서산 문하 4대파와 부휴 문하 7대파가 대세를 이루었다.
서산 문하의 四浪, 報羊 제파와 부휴계 署巖派가 중심이 되어 수행과 강학체계를 정비하였다. 看經과 參禪, 念佛을 복합 수행하는 것이 보편화되 었다. 승가의례가 확립되고 사미, 사집, 사교, 대교과로 구성된 승가 교육과정이 확립되었다.
조선시대 사찰 수는 각종 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초의『新增東國與地勝覽』불우조에 기재된 전국 사찰 수는 1,618개소이다. 그 중 경상도 사찰 수는 284개소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경북 사찰 수는 151개소이다.
조선 후기 영조 후반에 전국 읍지를 종합한『與地圖書』에 기재된 전국 사찰수는 1,902개소인데 경상도가 475개소로 가장 많다. 그 중 경북지역은 249개소로 기록되어 있다. 1937년 정원호에 의해 간행된『橋南誌 』에는 경북지역 사찰이 413개소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현존 사찰은 325개소이다.
전체적으로 사찰 수의 증가는 寺의 경우는 오히려 감소하고 부속 ()의 수가 증가 한 것은 山間佛敎化를 반영 한다. 1737년(영조 13) 부호군 李穆은 당시 영남지방에는 300여 개소의 사찰이 있으며, 사찰마다 승도 수가 400~500명에 달할 것이므로 그 인구는 12~15만이 될 것이라 하였다.
전국적으로 승도 인구가 良人納布軍의 수보다 많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에서 영남지역 사찰 수와 승도 수를 파악한 일단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는 각종 승역과 잡역을 부과하여 사찰에 대한 폐해가 컸다.
서원 등 지방 기관의 屬寺가 되면서 향촌의 존립 기반을 확보하고 승려의 사유 재산을 사찰에 기진하고 다양한 寺刺契의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사찰을 유지 . 계승시켰다.
조선후기 경북지역 불교계는 왕실의 願堂이 되면서 사세를 유지한 사원들이 다수 있었다. 동화사, 은해사, 파계사, 고운사, 김용사 등이 그러하였다. 각화사는 태백산 史庫 수호 사찰로 지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