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신라를 둘러싸고 후백제와 충돌하였다. 그 주된 지역은 경상도 외곽 지역이었다. 지역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 지역의 호족 세력을 규합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지역을 초월하여 시상적 교류와 감화력을 지닌 사원 세력의 도움도 중요하였다.
또한 태조는 선사의 교화력을 바탕으로 지방 세력을 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태조가 이들 사원과 승려의 도움을 받고 중창을 지원한 사례가 있다. 예천군 직할지 일대는 후삼국시기 고려에 우호적인 동향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천군 직할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龍門寺重修記」에 고려 태조가 후삼국 정벌 중 용문사에 들러 杜雲 선사를 만나 密約을 하였고 통일 후 칙명으로 용문사를 중건하고 州懸의 稅祖를 매년 150石 제공하도록 하였다 한다.
예천 境淸禪院은 洪俊의 탑비가 세워진 곳이다. 홍준은 두운보다 뒤에 활동한 승려인데 그의 이력과 활동은 비문에 자세하다. 영주의 小白山寺는 口運이 태조의 배려로 머물렀고 그의 사후 비문이 세워진 곳이다. 문경 鳳巖寺는 康州 伯嚴寺에 있던 就讓이 935년태조 ()에 도착하였던 곳이다.
금산「直指寺事積碑」에는 能如대사가 태조의 인동 싸움에 신력으로 도와주고 적을 이길 수 있는 시기를 예고해주었다고 한다.『三國遺事』寶壞利木조에 의하면 태조가 동정하여 淸道 지경에 이르러 산적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당에서 귀국하여 밀양지방의 奉聖寺에 머물고 있는 보양이 지세를 이용한 작전을 지시하여 쉽게 공략하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는 보양의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청도 韻阿寺를 雲門寺로 사액하였다. 태조는 통합 초에 상주 萬括山 동남 모퉁이에 빼어난 곳을 점지하여 6煩을 入田하여 화엄 원교를 천양하는 곳으로 하였는데 龍巖寺였다.
海印寺의 화엄교단을 양분하여 태조의 복전이 되었던 滯期도 태조가 백제 왕자 月光과 싸울 때 神兵을 보내 그를 도와주었으며 그 후 태조가 해인사에 500결의 토지를 지급하고 있음이 후대 자료인「海印寺古蹟」에 남아 있다.
공산 智妙寺는 태조가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 포위당하여 위급할 때 申崇課과 金樂이 힘써 싸워 죽음으로써 위기를 면한 일로 인해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상에서 후삼국 쟁패기에 고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와 접경 지역인 봉화, 문경, 예천, 김천. 의성, 합천, 청도, 밀양 등의 지역 사원 도움이 고려가 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두운, 흥준, 구운, 긍양등의 신라와 친연이 있었던 선승의 포섭은 후백제 보다 한 걸음 앞선 불교계 포용책이었고 통일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대 지원 사원은 고려시기에 중요한 사원 곧 碑補寺社로 인식되어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태조 이후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각 邑基에 신라 이래의 사원을 재정비하거나 새로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례로서 예천 開心寺와 약목 淨兒寺의 불사를 통해서 잘 알수 있다. 예천 개심사에는 오층석탑이 건립되었다. 1010년 현종 2월에서 1011년 4월까지 세웠는데 石塔의 記文이 있다.
이 석탑 불사를 주도한 棟梁 戶長 林長, 崔神, 그리고 副棟梁 邦祐 등의 인명이 보인다. 예천 개심사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苦木郡의 淨兒寺 오층석탑 형지기의 내용을 분석하여 약목군의 규모를 千丁 이상으로 파악한 연구를 참조하면, 호장층 세력은 호장 8명 부호장 4명이 된다.
이들은 예천군 호장세력의 일부였으며 고려의 성립에 따른 향촌 세력의 재편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와 같은 예를 통하여 성 립된 계수관 주치와 부, 군, 현의 중심 사원 이른바 資福寺는 국가 불교 의례의 중심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계수관의 중심 사원에는 國王祝壽. 八關會. 輪經會, 飯僧, 鎭兵法席 등이 열렸다. 그 이하 부, 군, 현 단위에는 국왕 축수 도량을 제외한 윤경회, 반승, 진병법석 등이 열렸다. 경주에서 윤경회가 있었던 사실은 일연이『삼국유사』에 “그 經株은 지금 東都의 僧司藏中에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轉經하여 재난을 물리쳤다”라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一邑一資福寺 이상의 사원 분포가 있었다. 고려 초 불교계는 法眼宗 계통이 주도하다가 智宗이 居頓寺로 하산한 현종대를 기점으로는 玄化寺를 중심으로 한 揄伽宗과 문종대 興王寺를 중심한 華嚴宗이 주도하였다.
유가종과 화엄종의 교세 대결 국면은 ()顯의 활동과 義天의 활동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1101년(숙종 5) 천태종 승과가 실시되고 중심 사원 국청사가 마련되었으므로 천태종이 형성되었다. 고려초 법안종 계열 五門 사찰과 의천의 직계 제자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의천 사상통합운동은 선종에서 6, 7할이 傾屬되었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선종의 위기를 가져왔다. 화엄종 내부에도 균여 이래의 화엄종과의 분파가 있었다.
교단이 정치세력에 휩쓸리면서 법상종 내에서는 이자겸의 아들 義莊과 德課의 대립, 화엄종단 내에서는 이자의 난 때 흥왕사의 智始와 의천의 갈등 그리고 이자겸 난 때도 ()이 흥왕사를 떠나 있었던 사실은 화엄종단 내의 분파를 암시한다.
선종 내에서도 천태종에 흡수된 분파와 그렇지 않은 분파로 나뉘었다. 천태종에 흡수되지 않은 선종은 蕙照國師, ()然 등의 굴산문계열과 學一 등의 가지산문 계열이 서로사상적 경향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교단과 문벌귀족의 관련 및 불교계의 정치 현실에 대한 간여, 그에 따른 승려의 세속적 가치의 추구를 반영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중앙교단에 실망한 각 종파의 승려들이 지방으로 퇴거하여 새로이 기반을 잡거나 혁신 사상운동을 벌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먼저 천태종단은 의천의 사후 직계 문도인 翼宗이 1104년(숙종 9) 숙종의 判으로 天合大法卷 중에 으뜸이라는 판시를 받았지만 익종이 사거한 후 익종의 제자 敎雄은 궁벽한 곳으로 주지를 배정받고 門弟들이 흩어지는 위기가 있었다.
예종대 ()眞과 학일이 국사, 왕사로 부각되자 천태종 형성에 합류한 선종 출신들이 1136년인종 14 경상도 인동 南崇山 儀鳳寺에 의천의 비문을 세움으로써 다시 산문을 결집할 수 있었다. 의종, 명종대에는 교웅의 제자 德素가 宗頭學으로서 천태종의 승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므로 천태육법권 중에 남숭산 선봉사가 그 중심이었다.
천태종 내의 혁신운동으로 추정되는 功德山 東白社의 성립이 1199년(신종 2) 경 精通師, 承座上에 의해 이루어졌다. 40여년 뒤 崔激에 의해 중수되고 天頭이 주맹으로 초청되 었으며 몽고압제기 丁午도 이곳에 머문 적이있다.
화엄종의 경우 의천의 ()로 알려진 ()은 태백산에 돌아가 覺華寺를 창건하고 법시를 여니 사방의 학자가 폭주하여 날마다 천명은 되어 法海龍門이라 하였다. 계응의 비가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公山 夫人寺와 명종대 개창된 龍壽寺는 계응의 법손에 의해 경영되었다.
의천에 의해 주도된 大藏經 조조 사업 결과 대장경판이 계응이 하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인사에 보관되었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점과 예종대 퇴거한 계응이 의천의 적사였다는 점과 함께 고려 하면, 의천의 화엄 사상은 계응에 의해 주도되고 그 중심지는 경상도 지역 태백산과 공산이 었다.
1197년(명종 27) 흥왕사에 주석했던 家一이 高靈의 盤龍寺에 내려와 결사를 주도하여 學佛者가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화엄신앙을 진작한 예가 있다. 무인정권기 대 교종 탄압이 점증하자 지방으로 퇴거하여 화엄종풍을 유지 한 사례로 생각된다.
신종, 강종 연간에도 화엄 승려 大孤가 固城 水宮寺에서 華嚴結社를 주도하고 고성 지방관 朴文備의 도움과 국왕의 제가 등으로 모임이 지원된 예가 있다. 이 역시 화엄종풍의 혁신과 지방화 운동의 일환이었다.
유가종 승 津債이 1123년(인종1)에서 1126년 사이에 智異山 五臺寺를 중수하고 水精社를 건설하였다. 이 모임의 목표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해탈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었다. 진억은 현화사의 혜덕왕사에게 수학한 유가종승이다.
이 수정사 건설에 협조한 해인사 주지 翼乘은 석탑을 세우는데 협조하였다. 해인사는 화엄종 사원이므로 익승은 화엄승으로서 수정사 결사에 협조한 것이다. 禪師 永誠은 대장경을 수집하는데 협조하였다. 禪講院의 고승과 일반신도로서 社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3000명이나 되 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정사는 유가종이 중심이지만여러 종파의 협조가 있었다. 이는 사상적 교류와 공감도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세속의 일반 신도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천 사후 지종 이후 처음으로 선종 출신으로 담진이 1107년(예종 2)에 왕사로 1114년(예종 9)에 국사로 책봉되어 선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담진은 의천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상을 탐색하고 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入宋하여 당시 다양한 선풍을 수용하고 유교와의 융합도 모색한 習合折袁的 사상을 특징으로 한 淨因道휴의 선풍을 전하여 왔다. 담진의 제자로 ()然, 之印,貫乘,英甫등이 있었다.
혜조국사의 제자 탄연은 1145년(인종 23)에 왕사로 책봉되고 1147년(의종 1)에 진주 斷俗寺로 하산하였다. 1158년(의종 12) 입적할 때까지 10여 년 간 단속사에서 학인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현학하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물과 같이 찾아 와서 항상 회하의 대중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단속사는 12세기 중반 한 시기 굴산문 탄연의 선풍이 크게 떨친 곳이었다. 굴산파의 선풍은 知話에 의해 계승되었다. 지눌은 昌平生 淸源寺에서『육조단경』을 읽고 뜻을 얻고 예천 보문사에서『화엄론』을 읽고 신심을 내고,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읽고 지혜의 앎이 더욱 높았다 한다.
이로 보면 지눌의 사상적 완성은 청원사, 보문사, 상무주암에서의 이루어졌는데 두 곳이 경상도 지역이었으며, 수행의 결사를 선언한 곳은 居祖寺였다. 지눌의 대중 작법은 조계산 수선사였지만 수행과 득도는 경상도 지역이었다. 한편, 가지산문의 學一은 인종 즉위년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총림 납자들이 과반이 넘게 천태종에 경속되는 것을 보고 祖道를 호종하였다. 그의 비명에는 선종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오직 사의 덕이라 한 것으로 보아 굴산문의 혜조국사와도 선풍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1129년(인종 7) 왕사로서 雲門寺로 하산하여 산문의 융성함이 근고 이래 이 같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학일이 입적한 1144년(인종 22)까지 15년 간 많은 문도가 형성되는 등 태조에 의해 사액된 이래 성황을 이루었다. 몽고의 침입은 경상도 지역에도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천책은「유사불산기」에서 상주 大乘寺에는 한 노승이 사미 한 명만 거느리고 머물고 있었고 최근 몽고병이 관문을 범한 때문이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병화가 거쳐간 뒤에는 단나의 공급이 끊어졌다는 말까지 하였다.
또한「興輪寺大鐘銘井序」에서도 “해마다 오랑캐가 쳐들어 와서 휩쓸었던 때문에 화재로 말미암아 불당과 보배스런 종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조석으로 올리던 예불의 소리도 끊어졌으니 애석하다”고 하였다.『고려사』에는 1238년(고종 25)에 몽고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이규보는「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무릇 몽병이 경유하는 곳은 불상과 楚書가 모두 소실되었다”라 하고 특히 符仁寺의 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경상도지역에서는 상주, 공산, 경주 지역의 불교 사원이 크게 피해를 입었음을 알수 있다.
몽고 침입 피해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은 파괴된 불사의 재건을 통한 항몽 의지를 높이고 단결을 촉구하는 것이 었다. 몽고에 의한 공산 부인사 대장경판의 소실에 따라 재조대장경 조성 사업을 통한 항몽이 있었다. 鄭()이 남해 私第를社로 하여 이름을 定林이라 하였으며 일연이 초청되었다.
私財 반을 들여 대장경을 간행했다는 사실을 종합하면, 남해분사도감은 정림사가 중심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또 이 부근의 진주 斷俗寺의 역할도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1248년(고종35_ 동경 東泉寺에서 균여 저술의 하나인『釋華嚴旨歸章圓通()』의 교정과 편집이 이루어졌고 이는 재조대장경의 보유판으로 수록되었으므로 경주에서도 재조대장경 사업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 간섭기에는 불교계의 재편이 있었다.
이에 따라 가지산문의 一然 1206~1289이 부각되어 국존에 올랐다. 그는 章山 경산 출신으로 包山비슬산에서 20대 수행기를 보냈고 그의 노모의 묘소가 있는 賊角寺를 하산소로 지정받았다. 여기서 말년 5년여 기간 동안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여 구산문은 물론 불교계를 사상적으로 주도하였다.
그는 九山의 領油로서 그의 사후 50여년 뒤에도 이 인각사는 구산의 영수가주석하는 사원이 되었다. 사상계를 주도한 일연의 시상은 보감국사 비명에 ‘博學’이라 표현된 바와 같이 여러 사상과 교류를 통한 포용적 이고 탄력적인 것이었다. 가지산문의 기반은 混丘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일연의 추모사업 곧 인각사 비문의 건립에 적극 참여하고, 일연의 저술 특히『삼국유사』를 마무리하는 일도 주관하였다. 충숙왕은 그를 王師로 책봉하였다. 1315년(충숙왕 2) 밀양 坐源寺로 하산하였는데 이로 인해 1295년(충렬왕 21)에서 1296년 사이 천태종 소유가 된 것을 되돌리게 되었다. 松林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가지산문의 혼구와 대립한 천태종의 정오는 1307년(충렬왕 33) 왕사로 책봉되어 金藏寺로 하산하였다. 1308년 충선왕 즉위 강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후 폐허가 된 국청사를 수리하고 낙성 법회를 주관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충선왕이 영원사를 하산소로 청하여 하산하고, 1313년 충숙왕 즉위에는 충숙왕이 國統으로 삼았고, 1314년(충숙왕 1)에 진주 靈鳳山 龍巖寺로 하산하였다. 유가종단에는 惠永, 彈授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고 국존에 올랐다.
혜영은 문경군 출신으로 1228년(고종 15)에 출생하였다. ()德寺, 俗離寺에 머물렀다. 1269년(원종 10)에 僧統에 올랐다. 佛國寺, 通度寺, 重興寺를 거쳐 1285년(충렬왕 11)에 撤休寺 주지가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에 寫經僧 100여명을 거느리고 元에 건너가 世祖에게『金字法華經』을 바쳤다. 崇敎寺 別院으로 영입되어 國尊에 책봉되었다가 ()寺 주지로 임명되었다. 1294년(충렬왕 20) 입적하였다. 다음 세대 戰海府를 통한 승정권을 행사한 善山 출신의 미수에까지 유가종의 위상을 이어 주었다.
화엄종단의 경우 경주 출신의 體元이 海印寺, 盤龍寺에서 활동하면서 균여 계통의 사상 경향을 강조하였다. 체원은 반용사 사주로서 해인사, 법수사, 동천사, 각화사 등의 승려들과 함께 저술과 경전을 편찬하였다.
觀音信仰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공덕과 영험까지 표방하고 심지어 민간신앙과 결합된 성격을 띤 염불신앙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몽항쟁기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강조된 균여 사상의 華嚴神衆信仰의 부각과 같은 맥락에서 1300년대 중반 몽고지배기 지방 사회의 현실 구원의 역할이 그의 사상경향이라 할수있다.
고려말 경상도 흥해 출신이며 1307년(충렬왕 33)에 태어나 13세에 반용사 —非大師에 출가한 千黑가 1367년 5월에 국사로 책봉되 었다. 1372년부터 浮石寺에 주석하면서 殿堂을 일신하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다. 당시 위축된 화엄종세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 이래 화엄종이 확산되는데 본거였던 부석사를 수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