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설립과 확산은 불교의 정착화 과정에서 旣存信仰의 聖地 곧 소도지역 내지 祭場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에 의해 기존신앙이 포용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天鏡林의 樹木이 잘리고 興輪寺가 들어섰으며, 이와 함께 기존 신앙의 성지로 알려진 前佛時代의 七處伽監地홍륜사 : 金橋 동쪽 천경림. 영홍사: 三川岐, 영묘사: 沙川尾 황룡사: 용궁 남. 분황사: 용궁 북. 사천왕사: 神遊林. 담암사: 서청전『삼국유사』아도기라로 불리는 곳에 중요사원이 들어선다든가, 石南寺가 원래 葛盤地였던 곳에 세워진 것, 雲門山의 韻甲寺가 그 주변의 기둥과 주춧돌로 그대로 지어진 예, 또 仙桃山의 安興寺가 神母의 啓示로 세워진 사례 등은 모두 기존 신앙의 성지에 불교사원이 들어서면서 불교가 기존신앙을 흡수하여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四天王寺는 불교의 세계관인 須彌山을 浪山에 관념하여 성립하였다. 皇龍寺는 황궁을 지으려다 절로 바꾼 것인데 습지를 다져 절로 하였다. 이후 여기에 황룡사 九層塔을 세움으로써 국가의 번성과 안녕을 기원하는 鎭護國家의 관념이 반영되었다.
讀傳이기는 하나 靈妙寺는 본래 大澤이었는데 豆豆里의 무리가 하룻밤에 메워 절을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기존 신앙의 성지가 前佛時期의 절터로 관념하여 사원을 창건한 것은 ‘佛國土思想’의 반영이다. 그리고 수도의 습지를 메워 절터로 한 사례는 사원의 창건을 통한 首都의 정비를 반영한다.
황룡사의 구층탑 건립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鎭護國家思想’ 이 반영된 것이다. 신라의 사원 분포는 수도 金城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중고기의 흥륜사 공사의 착공은 535년이고 그 완공은 544년으로 정리된다. 흥륜사라는 사명은 眞興王이 완공 후 ‘大王興輪寺’라 사액하였다. 또는 ‘大興輪寺’라고 한다.
534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川前里書石 甲街銘」에는 ‘大王寺’라는 사명이 보이는데, 이와 관련이 있다. 법흥왕이 창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만년에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스님이 되어 法空이라 한 것으로 보아, 법흥왕이 終命한 곳은 바로 흥륜사로 생각된다.
스님으로 종명한 것은 바로 ‘捨身’ 공양인 셈이다. 법흥왕은 흥륜사의 착공에 주도적이었고 또한 거기서 종명하고 大王興輪寺라는 賜額이 다음 왕인 진흥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로 보아, 흥륜사는 법흥왕의 願利로서 출발하였으며 신라 佛敎興法의 성지로서 그 위상을 지녔다.
皇龍寺는 진흥왕이 553년에 착공하여 569년에 완성하였다. 진흥왕과 관련이 깊고 그 규모가 가장 컸다. 645년에 9층 목탑이 완공되어 비로소 그 사원의 모든 규모가 정비되었다. 천주사는 內帝釋宮이라고도 하는데 眞平王이 殿延에서 天使로부터 신라 三寶의 하나인 天賜玉帶를 받았던 사실과 관련된다.
이로 보면, 흥륜사, 황룡사, 천주사는 중고기의 국왕과 관련된 사원이고. 영흥사는 법흥왕비. 진흥왕비와 관련이 있으며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는 사원이었다. 중대에 새로이 등장한 무열왕계는 새로운 사원 조성으로 王室願堂은 물론 國家 儀禮까지 담당시켰다.
중대의 왕권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특별히 成典이라는 관부를 두는 사원을 그 배 경으로 삼았다. 그러한 사원으로 四天王寺. 感恩寺, 奉聖寺, 奉德寺. 奉恩寺. 靈妙寺, 永興寺 등 7寺가 주목된다.
성전 사원이 성립된 신문왕대에 성전이 설치된 사원으로 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영묘사, 영흥사가 있고, 성덕왕대에 봉덕사, 혜공왕대 봉은사, 그리고 애장왕과 흥덕왕 사이에는 황룡사에 각기 성전이 설치되었다.
신라의 중앙행정관제는 물론 9주 5소경을 비롯한 통일신라 문물제도를 완성하고 전제 왕권 확립에 큰 계기를 마련한 神文王代에 成典 寺院이 집중 성립되었다. 神文王은 봉성사와 감은사를 완공하였고, 文武王代에 창건한 사천왕사를 중시하였다.
密敎와 관련 지어 四天王寺의 부각을 설명한 주장이 있다. 사천왕사만이 아니라 奉聖寺와 感恩寺 역시 밀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원으로 파악되었다. 사천왕사에는 文豆婁秘法이 시행되었던 시설이 遺地에서 추정된 바 있고, 그리고 봉성사는 밀교승 惠通이 그 창사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밀교적 분위기가 있다.
감은사 역시 龍神이라는 수호신 신앙에 바탕하였으므로 밀교적 분위기가 있다. 가람배치나 유물의 미술사적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雙塔式 가람이라는 신라 특유의 양식으로 창사되었고, 四天王像의 조각 작품이 사천왕사지에서 수습된 채유상이 있고, 감은사 동탑, 서탑의 舍利函에 조각된 사천왕상을 들 수 있다.
사천왕상은『金光明經」에 따로 四天王品이 독립되어 사천왕의 護國 의지를 잘 나타낸다. 그리고 감은사지 金堂地에는 높은 기단에 석재를 연결하여 마루처럼 그 아래 넓은 공간을 두었다. 또한 감은사 가람 토축 아래에 龍潭地도 존재한다. 龍神信仰과 관련이 있다.
사천왕사에서 시행한 문두루비법에도 龍王과 관련된다. 이러한 밀교적 성격과 미술적 특징에 바탕 한 종파는 神印宗으로 파악되며, 이를 주도한승려는 明朗과 惠通이었다. 중대 신인종의 성격은 명랑의 활동에서 알수 있다. 명랑은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하였다. 이 의식은『澤頂經』의 내용과 관련된다.
실제 내용에는 사천왕의 역할을 부각시킨다든가 輸加明僧 12人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짓는 점은 사천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는『관정경』과 관련되며 瑜伽唯識과도 관련된다. 중고기의 治病活動과 밀접했던 밀교적 성격이 ()兵密敎라는 護國的 성격으로 변모된 측면이 있다.
개인적이고 민중적 성격과는 다른 불교 사상이다. 이 같은 성격이 중대 왕권을 뒷받침한 불교사상이 었다. 신문왕대 창사된 감은사, 봉성사. 그리고 문무왕대 성립된 사천왕사에 양병밀교 사상이 반영되어 成典의 설치로 뒷받침되었다.
지방으로의 사원 확산은 五岳을 중심으로 분포되기 시작하였는데, 山岳崇拜信仰을 佛敎的으로 포용하면서 이루어졌다. 7세기 중엽부터 활약한 慈藏은 唐에서 귀국한 후 通度寺와 太和寺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집을 元率寺로 하였고, 만년에 臭州에 水多寺와 石南院을 세웠다.
北括 浮石寺를 중심으로 한 義相 弟子들의 華嚴十刹의 분포를 보면 신라 외각지 대의 중요한 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50년대부터 활약한 眞表에 의한 사원은 金剛數 그리고 俗離山의 吉洋數, 金剛山의 ?를 창건하였다.
眞表는 景德王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지방사회에 불교적 기반을 다졌다. 기층사회까지 확대된 불교를 기반으로 한 王權의 강화 의도에서 그 지원이 있게 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산악숭배신앙의 흡수가 있다. 전주 金山寺, 歸信寺가 8세기 중엽에 성립 되었다.
740년에 眞表가 금산사에 계단을 열었다. 귀신사는 道()이 18세인 816년에 화엄 교법을 공부하여 그 이전에 성립된 華嚴宗 사원이다. 신라 화엄경 寫經 跋文에 따르면 구례 華嚴寺의 창건은 8세기 중엽으로 짐작된다.
장흥의 迎智山寺는 元表大德이 법력으로 경덕왕에 도움을 주어 왕이 759년에 長性標 기둥을 세우도록 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사원이 성 립되 었다. 受戒 사례가 있는 사원으로 漢州의 莊義寺, 長谷寺 그리고 康州의 嚴天寺, 雄州의 普願寺, 明州의 法泉寺, 武州의 靈信寺 등이 확인된다.
8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州의 중요 거점 사원으로 성립되었다. 802년에 海印寺도 지방 사원으로 창건되었다. 9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禪宗의 유행은 지방으로의 사원 확산을 가속화 시켜 나갔다. 南原의 實相寺, ()州의 惠目山 高達寺 등은 선사들의 초치와 포용을 위한 사원으로서 의미가 크다.
많은 선종 사원의 성립 과정은 기존의 法相宗, 華嚴宗의 사원을 전환한 迎智山寺, 月光寺, 珍丘寺, 大安寺 등의 예가 있고. 창건한 경우로 雙溪寺, 知實寺, 法雲寺 등이 있다.
그리고 지방 세력의 원찰을 선종 사원화한 경우로는 龍嚴寺, 普賢山寺, 鳳巖寺 등이다. 신라 왕족의 원찰을 희사 받은 聖住寺, 安樂寺, 深源山寺, 石南山寺 등의 예도 있다. 禪宗 寺院은 신라 말의 풍수사상 특히 神補思想에 따른 성립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미 풍수적 경관이 뛰어난 浮石寺의 성립이나 海印寺의 창건에서 보듯, 사찰 풍수에 의한사원 입지는 7세기 후반 늦어도 9세기 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정부는 寺院의 地方化를 8세기 중엽부터 진행하였다.
9세기 중엽 선종 사원이 다수 들어설 때도 기존 사원이 선종화된 예가 다수이며 왕실의 지원과 추인 과정을 밟고 있다. 또한 사찰 입지의 사상적 관념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국토사상, 산악숭배의 영지관념, 불교적 세계관인 수미산관념, 진호국가의 관념, 수도의 개발과 정비라는 현실적 고려 등이 작용하였다.
지방 사원의 성립은 9주의 중심 사원으로서 계단 사원의 설정이나 대당교통로의 거점으로서 성립되고 각 지방 단위의 중심 사원으로서 ()基의 정비와 관련하여 들어서고 있었다. 881년 鳳巖寺의 성립에 사방에 이어진 기와 처마와 철불로 巖山 儀陽山의 지세를 진압한 것은 비보관념이 반영된 구체적인 예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浴山寺의 성립이 簡子로 점쳐 지은 것이나, 삼국시기 忠州 末()山 龍頭寺는 北秋이 자주 침범하여 물리치기 위해 세웠다고 한 것, 오대산月精寺는 地師가 국내 명산 중 제일 가는 勝地라 한 것 등은 이보다 앞서 사원 선정에 地勢를 고려한 관념이 작용한 것을 보여준다.
신라 말 普()가 海龍王寺를 安處할 만한 곳으로 선정 한 것은 禪師의 수행지로서 의미가 선정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道憲이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봉암사의 입지, 折中이 선을닦기에 佳景이라 한 石南山寺의 입지, 玄是이 禪居에 좋은 곳이라 여긴 高達寺의 입지 등이 그러한 면을 반영한다.
물론 산천의 지세를 고려한 풍수적 관념도 작용하였겠지만 보다 중요한 기준은 禪 修行의 안정에 있다는 것이다. 지방 세력의 명당 관념이나 지방 중심 관념이 핵심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신라 정부의 理念的 地方 支配를 위한사원의 배치와 입지가 적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