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개나무 잎차(茶)를 덖으며
꼭 출가한 스님이 아니라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진정으로 추구하는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근원을 생각할 때가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라. 궁금하기 짝이 없는 문제이다. 스님들도 자신의 근본을 찾기위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다.
있지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자리를 본래자리, 고향이라 한다. 그 고향을 찾아가는 일로 일상을 삼는다. 세상을 두루 다녀 봐도 고향만큼 편안한 곳은없다. 넉넉하고 편안한 어머니 가슴 같은 고향을 찾는 일은 숨 쉬는 생명들의 근본 의지인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는 방랑자이다.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향은 아침의 안개속을 거닐면서도 만나고, 영롱한 이슬을 보다가도 문득 만난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서도,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소리에서도 근원의 자리를 만나기도 한다.
죽은듯 고요히 한겨울을 지내다가 늦은 봄깡마른 나뭇가지에서 연초록 잎을 퇴우기 시작한 헛개나무가 유월이 되면 들깻잎 만큼 이나 큰 잎사귀를 만들어 내며 쑥쑥 자란다. 숙취 해소, 주독 해소의 효과가 있어서 먹으면 취한 술이 헛것이 된다고 하여 헛개나무라는 재미 있는 이름을 얻게 된 나무이다.
한방에서는 지구자나무로 알려져 있다. 몇 년전 어느 스님이 헛개나무를 도량에 심어보라며 묘목 세 그루를 줬고, 또 서울 농대의 모 교수가 보내준 묘목이 있어 심었는데 다른나무보다 오히려 성장이 잘 되었다. 보광사 뒷산에는 수많은 종류의 약초와 나무가 있다.
산을 오르다 보면 그 중에 헛개나무도 간간히 보였다. 봄이 되면 마을 아낙들이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라가는데 끼니때 허기진 배로 헛개나무 잎을 따 밥을 싸서 먹어보니 그야말로 꿀맛이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마을 청년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서 헛개나무가 서 있는 곳에 가보았다.
헛개나무가 간에좋다는 매스컴의 보도 때문인지 그 큰 헛개나무가 무자비하게 통째로 베어져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욕심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이제는 산에서 헛개나무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여기저기 작은 묘목들이 눈에 띄었다.
묘목을 고이 뽑아 어미를 잃은 새끼를 보호하듯 싸와서 도량에 소중히 옮겨 심었다. 그리고 마을 청년에게 부탁하여 시장에서 어린 묘목을 더 구해다가 심었는데 지금은 제법 많이 자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시험 삼아 헛개나무 잎으로 장아찌를 담아서 반찬으로 먹어보니 입맛을 돋울 뿐아니라 단맛이 한참까지 목과 입 안에 감돌았다.
또 산에서 딴 헛개나무 잎으로 차를 만들어 보았는데 역시 차로 마셔도 향과 단맛이 좋았다. 간에도 좋다고 하니 더 많은 헛개 잎을 덖어 헛개차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린잎은 따서 장아찌를 만들고 색이 짙은 큰잎은 따서 숭숭 썰어 가마솥에 불을 지펴 세번을 비벼가면서 덖었다.
이글거리는 장작불에 달구어진 가마솥에서 헛개 잎이 덖여지며김이 오를 때면 단내가 가득 솟아오른다. 땀이 옷에 흠뻑 배어들면서 헛개나무 향에 흠씬 젖는다.비비고 덖어서 황토방에 하룻밤 말리면 황토방에도 향기가 가득 퍼진다. 장작불과 헛개나무 잎과 황토의 향기가 차에 그대로 스며 들어 한 맛으로 어우러진다.
처음 덖은 차는 소중한 분들에게 선물하고, 소포장 판매도 했다. 그때부터 헛개나무가 점점 자라 수확할 수 있는 잎의 양이 많아 지면서, 이제는 직접 덖지 않고 솜씨 있는 다원의 주인에게 헛개차 만들기를 부탁하여 조금씩 양을 늘려가며 차를 만들어 제법 생산량이 늘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 차 마시기를 즐기는 나는 한모금의 헛개나무 차를 마시고 난후 보이차를 마신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단맛이 입안에 감돈다. 고요히 창밖을 바라보고 앉았노라면 새소리가 새벽을 깨우고 물소리가 귀를 맑게 틔운다. 어둠이 가시고 온 산의 초록이 또 눈과 마음을 푸르게 한다.
♣ 보광사 보명 스님
울진 불영사로 출가했으며 현재는 경주 보광사에서 살고 있다. 사찰 주변의 야생 들꽃을 소재로 들꽃차 를 만들어 <산사의 들꽃 이야기> 책을 펴낸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