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따라 재료의 본질 따라하는 요리에서 나 자신도 알아갑니다
염색한 머리, 꽁지로 묶은 머리카락. 겉모습만 봐도 신세대 청년들이다. 하지만 칼과 냄비를 손에 쥔 자세는 자못 진지하다. 주방을 진두 지휘하며 날렵하게 움직이는 정관 스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눈매 또한 예사롭지 않다.
“빨리빨리 볶아내세요. 음식을 만들 때는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만들고 먹을 때는 슬로우 푸드처럼 천천히 먹는 겁니다.” 김창훈 셰프가 정관 스님의 말 한마디에 재빠르게 프라이팬을 돌려 오이와 노각을 볶아 냈다. 다섯 명이 복작거리는 좁은 공간, 그것도 불 옆에 서서 요리하기가 쉽지 않을 법도 한데 네 명의 셰프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
청년들은 장성 백양사 천진암에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7개월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미국, 호주, 프랑스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셰프로, 레스토랑 경영자로 활동했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이들은 어째서 내장산골 이곳까지 오게 됐을까? 청년들은 ‘정관스님의 음식 철학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뉴욕타임스는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을 ‘철학자 같은 요리사(the Philosopher Chef)’로 소개했다. 기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요리를 먹으려면 뉴욕이나 덴마크로 갈 게 아니라 천진암으로 가라”는 평이 담겼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스님을 찾아왔고 음식 다큐멘터리 에도 출연했다.
“처음에는 그저 요리 비결이 궁금했어요.” 프랑스에서 온 이수(28) 셰프는 사찰음식을 배우러 왔다가 ‘자세’를 배우고 간다고 했다. 르 꼬르동 블루에서 요리 공부 후 홍콩과 호주, 프랑스 등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그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양음식을 하면서도 한식이 너무 좋아 얼마 전 한국을 찾았다는 그는 유명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자극적인 맛과 보편화된 음식 속에 한국문화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백양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했고 쿠킹클래스에서 정관 스님을 만났다.
그는 “음식을 생명체 대하듯 하는 스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스님이 음식을 하며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과 무게가 있었다. 그 자신감에 이끌려 천진암에 짐을 풀었다. 미국 요리학교 CIA를 졸업하고 바로 천진암에 들어온 강승완, 류원석 셰프는 “처음엔 한식의 기본을 배우고 싶어 스님을 찾았다”고 했다.
강승완 셰프는 지인의 소개로 지난해 여름방학에 열흘간 천진암에 머물며 스님에게 사찰음식을 배웠다. 그외고 졸업 후 친구와 함께 스님을 다시 찾았다. 류원석 셰프는 “사찰음식을 배우러 왔다가 공양의 의미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자극적인 음식으로 빨리 배를 채워 왔던 지난날과는 다른, 먹는 행위에 집중하게 됐다”며 “음식을 대하는 자세를 새롭게 하며 친구와 함께할 도시락사업의 방향 설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맛있고 즐거운, 속도편한 그런 음식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한 30대 여성은 두 달 째 천진암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2월 방영한 넷플릭스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Chef s Table)’ 시즌 3을 보고 이곳을 찾아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6명을 조명한 에피소드 중 정관 스님은 1회의 주인공 이었다.
그는 “셰프는 아니지만 자연과 더불어 요리하는 정관 스님의 생활방식에 큰 감동을받고 천진암을 찾았다”며 ‘막 캐낸 재료로 만들어진 스님의 음식에서 풍부한 맛과 더불어 평화를 느낀다’고 했다. 스님은 4년 묵은 된장으로 아욱국을 끓였다.
아욱을 풀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 박박 치대 쓴물을 빼고 물에 행구었다가 물기를 꼭 짜냈다. 물에 된장을 풀고 감자와 호박은 칼을 대지 않고 수저로 그냥 쑥쑥 떼어 넣었다. 밀가루로 수제비를 얇게 펼쳐서 떠 넣은 후서로 엉겨 붙지 않게 중간중간 저어가며 팔팔 끓였다.
마지막에 청양고추를 손으로 뚝뚝 떼어 넣어주면 끝. “가을 아욱국은 사립문을 닫고 먹는다지요?” 그만큼 맛도 좋고 영양가도 높은 아욱국의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스님은 서둘러 마지를 준비하자고 했다. 부처님께 올리는 밥인 마지는 일반 공양과 약간 다르다.
우선 밥을 지을 때 잡다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밥을 지어 법당으로 옮길 때는 밥그릇을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옮긴다.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己時), 즉 오전 9시 30분~11시 30분에 올린다. 이날 마지는 류원석 셰프가 맡았다.
류 셰프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부처님께 올리기까지 차분하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마지 후 모두가 둘러 앉아 발우공양했다. 밥 한술에 아욱국 한수저, 아삭한 오이를 ‘아작아작’씹었다. 한곳에 모인사람들 입에서 똑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음~ 진짜 맛있다.” 김창훈 셰프는 정관 스님에게서 배운 사찰음식을 ‘마음음식’이라 정의했다. 그는 “정해진 레시피가 아니라 마음에 따라, 식자재의 본질에 따라 요리하는 스님에게서 식재료를 아는 것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음식을 통해 내 감정 상태까지도 읽는 것, 이것은 현장에 돌아가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라고 말했다.
끼니마다 정성껏 만든 밥상에 스스로 집중하고 그 마음을 읽어내는 것. 셰프들은 정관 스님이 사찰음식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몸소 체험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