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깊은 골에서 수행을 담은 사찰음식의 맛을 배우다
불혹을 넘겨 출가를 꿈꿨다. 수행자가 되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화두를 붙들고 싶었다. 숙세부터 쌓아왔을 불연이 무르익는 만큼 간절함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출가의 문턱에서 기웃거리다 발견한 건 뜻밖에도 공양간.
수행자의 몸을 북돋는 음식을 수행하듯 만든다면 그게 곧 출가요, 공양간은 선방이 될 터다. 이번 생의 마지막 발원이기에 힘들면 뒤돌아볼까 세속의 것 모두 털어냈다. 25년 전, 마하연 화엄사 사찰음식 전문위원은 자신 앞에 놓인 길을 숙연으로 받아들였다.
♣ 수행자의 몸에 들어가는 수행의 음식
부슬비가 내리던 5월 7일, 구례 화엄사에 도착했다. 제6기 ‘산사의 밥상, 수행의 향가’의 아홉 번째 강의가 열리는 날. 비에 젖은 천년 고찰을 거닐다 공양간에 이르러 부산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만났다. 오후 1시 시작이지만 정오가 되기 전부터 공양간은 강의 준비로 북적인다.
오늘 만들 음식의 재료를 각 테이블에 옮기는 데만도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테이블마다 조원의 이름이 적힌 알림판이 놓여 있어 하나하나 세어보니 12개. 정원은 45명이지만 4~5명이 한 조를 이뤄 총 50여 명이 강의를 듣고 있다. 2015년 제1기에서 지금까지 수강인원은 늘 정원을 넘겨왔다.
구례와 가까운 광주, 여수는 물론이고 서울, 부산, 포항에서도 오로지 이 강의만을 위해 화엄사를 찾는다. 높은 인기엔 이유가 있을 터. 약속된 시간에 맞춰 죽비 소리가 공양간을 가르고 대중의 시선이 앞쪽에 집중된다. “빗길에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앞으로 나오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마셔 볼까요.” 마이크를 잡은 마하연 전문위원이 대중을 공양간 한편으로 이끈다. ‘산사의 밥상, 수행의 향가’강의는 다과를 나누는 동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하연 전문위원은 사찰음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드는 이의 마음을 꼽는다.
수행자의 몸에 들어가는 음식은 수행을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수행자의 기운과 만드는 이의 기운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강의에 앞서 차를 마시는 것은 그 기운에 이르도 록 하는 준비 과정이다. 10여 분이 지나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됐다.
첫 번째 음식은 영양밥. 밥에 들기름, 소금을 넣어 초벌무침을 한다. 여기에 볶은 양념을 넣어 익힌 우엉에 청피망, 파프리카, 대추를 무친 뒤 다 같이 버무리면 완성. 머위, 곰취에 싼 영양밥에서 나오는 진한 향취가 코끝을 간질인다. 한 입 베어 물으니 입 안 가득 퍼지는 자연의 맛. 싱겁지 않은 담백함 그 자체로 깊디 깊은 맛을 자아낸다.
간결한 재료에 간결한 손놀림만 더 했을뿐인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오는 걸까. “어때요. 좋은 도반을 만났을 때의 향내 같지 않나요. 머위와 곰취는 지금이 제철이죠. 건강엔 제철음식을 먹는 게 가장 좋아요.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이 그때그때의 기후를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것이니까요.
스님에게 제철음식만 만들어 주어도 수행하시기 참 좋습니다. 아시겠죠?” ‘스님이 먹는 음식’. 마하연 전문위원이 생각하는 사찰음식의 진면목이다. 싱싱한 제철재료를, 그중에서도 좋은 것만 모아 스님에게 공양올리는 것. 수행자의 기운과 만드는 이의 기운이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하연 전문위원은 절집에 들어온 이래 이 화두를 놓아본 적이 없다. 이른새벽 법당에 가장 먼저 올라가 부처님께 정성껏 예를 올리고 마음을 집중한다. 안거 기간 강의를 열지 않는 것은 그 역시 스님들처럼 참선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정진이 손끝을타고 전해지면 비로소 스님이 먹는 사찰음식이 된다.
‘산사의 밥상, 수행의 향가’강의가 몇 년째 높은 참여율을 보이며 이어지는 배경엔 마하연 전문위원의 이러한 신념과 정진이 있다. 때론 힘들어도 강의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여기서 배운 사찰음식이 한명의 스님에게라도 더 공양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 음식에만 집중하게 되는 재료본연의 맛
영양밥에 이어 머위대흰깨탕을 만들 차례. 영양밥을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수강생들이 이번에도 진지한 표정으로 마하연 전문위원의 말에 귀 기울인다. 설명에 따라 머위대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들기름, 소금을 넣어 무친다. 이번엔 표고버섯을 채 썰어 솥에 찐 뒤 들기름, 소금을 넣고 무치고 볶는다.흰깨는 쌀가루, 물과 함께 믹서에 갈아 자루에 넣고 짠다. 머위대, 표고버섯, 흰깨를 넣고 끓이면 먹음직스런 머위대흰깨탕이 된다. 영양밥과 마찬가지로 담백하면서도 깊으며 맑고 깨끗하다. “맛있다”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마지막은 얼갈이배추 물김치다.
열무와 배추를 씻어 소금물로 간하고 보리쌀 넣은 물은 20분 정도 삶아준 다음 꺼내어 푹 끓인 뒤 곱게 갈아준다. 청고추와 배는 갈고 무와 홍고추는 채 썰어 모두를 혼합하면 끝. 수강생들이 앞으로 모여 사진을 찍는다. “맛있다”는 탄성이 다시 한 번 터진다.
그것은 우리가 늘 접해오던 음식과는 다른 재료 본연의 맛이다. 가미하고 변형하여 재료의 맛을 뒤로 숨게 만드는 대신, 재료들이 어우러져 본연의 맛을 내도록 하는 것. 가미하고 변형된 것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음식에만 집중하게 돼 먹는 행위가 곧 수행이 되는, 바로 사찰음식이다.
사실 마하연 전문위원은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 사찰음식을 만들겠다는 25년 전의 발원도 그래서 무모했을 수있다. 하지만 그에게 사찰음식은 수행자의 기운을 북돋는 것이고, 그러기에 철저한 정진으로 지혜가 밝아지면 그 과정에서 요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같은 재료를 써도 강의 주제는 늘 다르다. 그는 이를 “요리가 무한히 펼쳐진다”고 표현한다. 기후와 토양, 햇살과 바람이 기른 제철재료는 그의 손에서 다양한 음식으로 변주된다. 어느 날인가 마음이 가는 대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이 음식을먹고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지금 수행자의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 없는 가운데 듣게 되는 것. 마하연전문위원이 사찰음식을 통해 건네고픈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