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쾌한 두 스님의 살림 살이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새벽 일찍 출발했음에도, 윤필암에 발을 디뎠을 때는 약속한 시간을 살짝 넘긴 후였다. 역시 장거리를 움직이는 일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서둘러 들어간 공양간은 재료 준비로 분주했다. 제대로 인사를 건네기도 어려울 만큼 정효 스님의 손과 발은 빨랐다.
윤필암(템플스테이 운영사찰 대승사의 산내암자)의 공곡 스님도 곁에서 이리저리 필요한 것을 거든다. “정효 스님, 그 그릇보다는 이 그릇으로 해봐요!” “정효 스님, 그거 벗고 위에 이걸 입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오늘의 주인공 정효 스님보다 공곡 스님이 더 안절부절이다.
두 스님은 사찰음식 지도자 1기 과정의 동기이자 절친한 선후배 사이. 후배스님이 혹여나 잘못하는 게 있을까, 실수하는 건 없을까 살뜰하게 챙기는 마음이 엿보인다. 정작 정효 스님은 그때마다 “아, 그럴까요?” 방긋방긋 웃을 뿐. 공곡 스님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짐짓 책망하는 듯, “그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하면서도 뒤돌아서서 키득키득 웃는다.
1~2년 쌓인 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곁에 서 있던 옥동식 셰프도 그 모습을 보며 만면에 웃음 한가득이다. 두 스님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장단이 척척이다. 공간이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는다. 사람의 살림이 공간의 기운을 결정짓는 게 아닐까.
가을을 지나 겨울로 들어가는 계절이 왔음에도 윤필암의 첫 느낌이 그토록 따스한 이유를 알겠다. 문경의 윤필암은 진입로에서 부터 비탈길을 따라 한참 구불구불 올라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이 길을 따라 오르려면 고생 깨나 했겠다. 그만큼 사찰의 자리가 깊숙하다.
윤필암은 사불산 대승사의 부속 암자다. 고려 후기인 1380년 각관 스님과 김득배의 부인 김 씨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나옹 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었는데,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목은 이색이 기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색은 기문을 지은 집필료를 따로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비용을 충당하도록 배려했는데, 윤필암이 라는 독특한 이름은 여기서 기 인한다.
산길 끝자락에 앉은 윤필암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살이 잘 드는 골짜기, 경사면을 따라 층층이 앉은 모습이 아름답다. 사불전 위에 오르면 윤필암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찍는 사람 사이에서는이 자리가 윤필암의 명당으로 유명하다고. 계절의 문턱에서 산자락을 휘감는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절이 앉은 자리가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리라.
♣ 해인사 보현암에서 대를 이어 전한 요리
한국사찰음식문화체험관에서 사찰음식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정효 스님이 준비한 요리는 세 가지.표고버섯밥, 육근탕, 새송이구이였다. 그중에서 가장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근탕부터 시작했다. 문득 의문이 일었다. 왜 육근탕일까?
“여섯 가지 뿌리채소로 만드는 음식이라서 육근탕이에요.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각기관을 말하는 육근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 육근과 연결 지어 의미부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좀 더 그럴듯한 사찰음식으로 포장할 수 있었을 텐데, 스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라고, 전혀 다른 의미라며 선을 그었다. 그게 맞는 것임에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스님의 반응은 도리어 신선하다. 올곧게 수행을 해온 수행자라면 이런 담백함과 솔직함이 있어야 맞는 것일 테다.
“제가 출가한 곳이 해인사 보현암이에요. 보현암은 여기 윤필암처럼 선방이 있는 곳이에요. 스님들은 일반적인 수행이 아니라 특별정진을 할 때가 있어요.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고 말 그대로 용맹정진을 해요. 그럴 때는 3일만 지나도 이빨이 들뜨고 온몸에 이상이 오는 듯한 증상을 느껴요.
그때 기운을 돋워주는 보양식이 육근탕이에요. 절에 좋은 식재료라는 게 있었겠어요? 그저 여름에는 잎채소를 먹고 겨울에는 뿌리채소를 먹는 거죠.” 스님은 행자 시절 안거 기간이면 가마솥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근탕을 만들었다고 했다.
오랜 시간 가마솥에 볶고 또 볶아서 저녁 공양시간에 맞춰 내는 음식이었는데, 조금만 몸을 편히 하면 가마솥 안에 채소가 눌어 붙거나 타버려서 잠시도 쉴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기미가 보이면 어른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단다. 이제는 꽤 많은 사찰음식이 세상에 선을 보였고, 사찰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조리법도 꽤 많이 발굴됐다.
그럼에도 육근탕은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보현암의 음식이다. 정효 스님이 겨울 음식으로 육근탕을 고른 것도 그 옛날 보현암의 보양식이었던 이 음식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크다. 옥 셰프는 사찰음식에도 보양식이 있다는 사실에 적이 놀란 눈치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아도 보양식이 될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연근도 암수가 있다
재료를 다듬고 불을 올릴 준비를 한다. 착착착, 스님과 옥동식 셰프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차례로 뿌리채소가 준비되고 스님이 조리할때 필요한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했다. “가마솥에 할 때는 우엉을 그냥 넣지만, 집에서 할때는 우엉이 가장 잘 안 익어요. 그런 경우에는 우엉을 미리 데쳐서 사용하시면 한결 편리합니다.
볶을 때 맛있는 진액이 나오기 때문에 데쳐낸 물을 넣을 겁니다. 요리는 단순해요. 들기름에 계속 볶는 거예요. 센 불에 볶으면 타요. 뭉근한 불에 타지 않도록 채수를 넣어가며하루 종일 볶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볶다가 압력솥에 익혀도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시간이 충분하다면 스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으로 하는 게 가장 좋죠. 하지만 시간이 없다면 그런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옥 셰프가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의견을 전하자, 스님이 맞장구 쳤다. “맞아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어요.
압력솥으로 요리할 때 채소에서 나온 물을 다써야 합니다. 이 요리는 그 진액을 먹는 거니까요.” 이번에는 스님이 연근을 집었다. 연근 고르는 법을 설명하는데, 전에 들은 적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연근을 고를 때는 반드시 암수를 구분해서 고르라고. 연근에 암수가 있다니? 스님의 설명은 이렇다.
“연근을 고를 때 길쭉한 것은 숫연근이에요. 짧고 동글동글한 것이 암연근이고요. 연근은 암연근을 고르는 게 맞습니다. 토란도 굵은 것보다는 씨알이 잘고 크기도 작은 게 좋습니다. 아마 마트에서 보던 것과는 차이가 있을거예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육근탕을 볶는 사이, 표고버섯밥과 새송이구이도 준비를 끝냈다.
새송이구이는 정효 스님이 직접 레시피를 개발한 음식. 사과를 갈아서 만든 양념장에 새송이를 재웠다가 살짝 구워낸 뒤 매콤한 양념을 얹는데, 고기 요리를 대체할 만한 레시피라는 게 스님의 말이다. 그 위에 잘다진 잣을 올려 보기좋게 꾸몄다. 어느 새 오늘 만들어야 할 음식은 모두 완성. 이제 한 자리에 모여 맛을 볼 차례다.
♣ 전통과 퓨전,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상이 푸짐하다. 두스님은손이 크다. 메뉴에 없었던 국수까지 삶아서 수북하게 내주었다. 그 곁에는 잡곡밥까지 놓였다. 잡곡밥을 짓고 남은 누룽지의 맛을 보건데, 이 밥맛도 보통이 아니다. 이쯤 되면 사찰음식 코스로 상을 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은 국수, 그 다음은 잡곡밥, 마지막은 본 식사인 표고버섯밥이다. 육근탕과 새송이구이는 메인 요리로 자리를 잡았다. 바삐 젓가락과 숟가락이 움직이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상위에 놓인 요리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맛을 품었다. 식재료 본연의 맛도 살아있다.
옥동식 셰프는 육근탕을 두고 일반식당에서 특별한 메뉴로 팔아도 손색없다고 평했다. “재료가 가진 맛을 모두 끄집어 낼 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조리한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사찰음식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역시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최근에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하는 사람이 늘어 가는데, 이런사회적 현상에 부합한 음식이 될 거라고 봅니다. 지속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일반인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메뉴가 될 것 같아요.” 표고버섯밥은 표고버섯 특유의 향이 가득하다. 이 계절의 맛이 한그릇에 함축되어 담긴 느낌.
양념장은 넣어도 좋고 그냥 먹어도 좋다. 양념장에는 산초장아찌가 들어 있어 톡 터지는 산초가 씹힐 때마다 입안이 짜릿하다. 옥 셰프가 두 눈을 크게 뜨도록 만든 또 다른 음식은 새송이구이다. 정효 스님이 봉녕사 강원시절 매콤한 음식을 해볼까 싶어 만든 것이라는데, 새콤하고 매콤한 맛의 밸런스가 오묘하다.
옥셰프는 “한번도먹어본 적 없는 맛’이라며 놀라워했다. 인공적인 맛이나 고기의 감칠맛이 없어도 상차림은 충분히 풍성해질 수 있다. 사찰음식의 매력이다. 정효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사찰음식이란 무엇일까요? 스님이 답했다.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 수행하는 마음으로 짓는 밥이죠.” 지극히 당연한 답인데도 그 뒤로 흐르는 여운이 길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문다. 됐다. 어렵게 받아들이지 말자. 사찰은 수행하는 곳이고 사찰음식은 수행하는 마음으로 지어 수행하는 사람이 먹는 것. 그것뿐이다. 공곡 스님이 지난봄에 만들어둔 발효유자차를 따라내주었다. 온 방안에 상큼한 유자의 향기가 가득하다. 창밖에는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계절은 그렇게 온몸으로 번지고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