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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사찰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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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사찰음식의 역사

마침 아침 공양 때라 부처님께서는 가사와 발우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 사위성 성안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차례대로 탁발을 하시고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두 발을 씻으신 다음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 「 금강경 」

♣ 걸식을 통해 만나는 일상식

부처님 당시의 식생활은 경전에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얻어먹는 걸식이었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은 수행자는 일반 세속인들이 주는 음식에 의지해 생존해야 했다. 하루 한 번 다 같이 마을에 들어가 줄을 지어 걷거나 혹은 흩어져 밥을 얻었다.

주어지는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없으며 때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도있다. 그런 날에는 굶을 뿐이다. 아프거나 탁발을 나갈 수 없는 이는 다른 수행자가 얻어온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함께 먹었다. 걸식한 음식은 한 자리에 앉아 다 먹어야 했으며 정오 이후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개인 소유물은 최소한의 옷과 탁발할 그릇, 약간의 약만 허용될 뿐 극도로 청빈한 삶이 요구되었다. 걸식을 통해 주는 대로 먹던 이 시기에는 사찰음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행자가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사찰음식의 초기적 모습은 유추해 볼수 있다.

첫째는 그 시대의 그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일상 음식이라는 점이다. 저장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제철 음식을 먹었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기에 구할 수 있는 지역 재료로만 만든 음식이며, 탁발을 나서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먹는 일상음식이라는 점이 사찰음식의 원형을 추측하게 해 준다.

둘째는 수행자들에게 드리기 위해 재료와 조리에 특별하게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라는 것이다. 살생을 금지한 부처님의 뜻에 따라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곡류와 채소를 주로 하고 자극적인 향신료를 피한 공양 음식을 만들어 보시 공덕을 짓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교단의 융성과 지리적 확산

세월이 흘러 부처님의 교단이 성장하면서 함께 생활하고 나누는 공동체의권역을 정할 필요가 생겼다. ‘한 사찰에 머물거나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수행자의무리’인 현전승가(現前僧伽)에서는 여전히 함께 생활하고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지켜졌다.

경계 밖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음식, 의복, 탕약, 승방의 네 가지를 제공했다. 공동체 구역에 들어선 이에게 구성원들과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보장한 이 정신은 불교가 특정 지역과 시대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인 세계의 정신으로 발전하는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현장스님이 먼 인도의 나란다대학으로 유학하고 귀국길에 수많은 경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혜초((慧超, 704∼787)스님이 신라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거쳐 인도 여러 나라를 오랫동안 여행한 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한 것도 오가는 길에서 만난 모든 절에서 남이 아닌 한 식구로 대우하며 보살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리와 풍토가 다른, 세계 여러 지역으로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수행자들이 먹는 음식또한 다양해졌다. 농업생산물이 풍요로운 지역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고 사막과 고산지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음식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저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만으로 견뎌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이 모든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불교는 세계 도처로 전파해갔다. 사찰이 커지고 지역마다 생겨나면서 공동생활하는 수행자들의 식생활도 점차 체계가 잡혔다.

아침의 탁발로 생활하는 지역은 초기 교단의 모습을 계속 유지했지만 탁발이 어려운 경우는 지역 유력자의 호의나 사찰에 기증된 재산을 바탕으로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다. 계율에서 금하지 않는 지역의 식재료를 구입하여 조리하여 먹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찰 음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노동하는 불교

♣ 노동하는 불교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과 부유층이 사원경제를 지원해 주었다.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만들고 왕실과 귀족들이 거대한 토지와 재물을 기증함으로써 불교는 탁발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선종(禪宗)은 이런 관습을 거부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백장회해(720~814)이다. 마조도일의 수제자인 백장은 선종사찰의 생활윤리인 청규를 지어 공동노동을 의무화하고 사찰토지의 경작에 솔선수범 했다. 그가 정한 노동의 원칙은 지금 북방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았다.

울력이라고 하는 공동노동이 그것이다. 사원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누구도 매일 매일의 예불과 수행, 울력을 거부할 수 없다. 백장회해는 나이 90이 넘어서도 자신이 정한 노동 원칙에 충실했다. 아침마다 쟁기나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다. 90이 넘은 노인이 밭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이 가득했다.

그만 하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결국 제자들은 호미와 쟁기를 감추어버렸다.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가려던 백장은 연장이 보이지 않자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제자들은 스승과의 고집싸움에서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알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식사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는 말이 여기에서 생겼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잘못을 빌고 다시 연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 기증된 토지에서 스스로 작물을 재배하여 조리해 먹는 선불교는 검박한 생활태도와 노동윤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때로 어려운 박해시기를 만나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노동하여 거둔 수확물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선종 특유의 사찰음식이 발달하였다.

사찰음식 제철식재료 요리

♣ 한국 사찰음식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 국가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받아들여 지면서 불교 정신이 담긴 음식문화는 널리 전파된다. 신라 법흥왕이 서기 529년 살생을 금지하라는 영을 내린 <삼국사기> 기록과, 백제 29대 법왕(재위599~600) 때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매 따위를 놓아주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태워 버리고 고기 잡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법왕금살(法王禁殺) 항목으로 전한다.

이처럼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장서서 채식을 권장함으로써 불교적 식생활은 점차 퍼지게 되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에는 육식을 자제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식문화가 널리 확산되었고 대규모의 각종 국가적 불교 의례를 거행하면서 사찰음식이 정교하게 발전했을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9~10세기에 이르러 한국에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했다. 선종의 노동윤리 또한 함께 들어왔다. 선불교는 초기에 중앙이 아닌 지방의 호족들에게 환영받으며 척박한 산중에서 수행생활을 유지했다. 물자가 부족하고 외부 지원이 빈약한 상황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길러먹는 선불교의 생활방식은 생존의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그 결과 한국 선불교에 있어서 노동은 윤리(倫理)를 넘어서서 수행의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기후와 풍토에 맞고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는 농작물과 채소류를 적극 활용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보다 깊이 파고들면서 서민들의 음식문화 속에까지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 사찰음식의 전승

사찰음식은 누가 담당하고 계승해 왔을까? 식재료를 생산한 것부터 따진다면 공동 노동에 참여한 승가공동체 구성원은 모두 사찰음식의 담당일 수 밖에 없으며 조리라는 과정으로 국한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모든 수행자는 처음 출가할 때 사찰음식을 조리하는 공양간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되고자 절을 찾으면 출가 생활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지 먼저 살펴본다. 일정기간 행자(行者) 생활을 하며 하심(下心)을 배운다. 세상 모든 존재가 자신보다 높고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출가 이전의 자아(自我)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도자(求道者)의 인격으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행자는 땔감을 구해오고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 ‘불목하니’, 스님들과 객실에 머무르는 신도들의 상을 준비하는 ‘간상(看床)’, 갖은 밑반찬을 만들고 온갖 나물을 씻고, 썰고, 데치고, 무치고 양념하는 ‘채공(菜供)’, 어느 정도 반찬 만드는 일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국을 끓이는 ‘갱두(羹頭)’ 소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최고참이 되면 행자수련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밥을 짓는‘ 공양주(供養主)’ 소임을 맡는다. 공양간의 행자 소임은 그 자체가 출가수행의 중요한 과정이다. 남들보다 더 먼저 일어나 밥과 반찬을 준비하고 한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막 출가해서 후원에서 밥을 할 때 설익히거나 태워먹는 등 온갖 실수를 한 출가 경험을 스님들은 즐겁게 회상한다. 행자들의 서툰 솜씨로 만든 밥과 반찬을 선배 수행자들은 말없이 먹어줌으로써 새로 온 후배들의 정성에 감사하고 격려함으로써 함께 수행의 길을 간다.

이것이 큰절 살림의 전통이다.그러나 좀 더 전문적인 기량이 요구되는 음식들이 있다. 미묘한 차이에도 맛과 저장성이 달라지는 식재료, 특별한 날에 올리는 정성 깃든 음식들 같은 경우는 대부분 여성 수행자인 비구니스님들의 섬세한 손에서 손으로 전승되어 왔다.

비록 신통치 않은 나물 한 가지라도 대중 스님들에게 좀 더 맛있게 드리려고 마음 써서 손질하고 맛과 향이 농축되도록 오래 보관하고 발효시킨 정성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이어지고 시대에 맞게 개발되면서 지금 사찰음식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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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대한불교조계종 •동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이심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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