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분류함에 있어 자생종, 교잡종, 교배종, 재래종 등의 구별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물 종의 분류 및 학명의 선택에 있어서도 전문가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어 종의 분포 또는 정확한 기재는 사실상 어렵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러 가지 독특한 형태, 형질에 따라 우리나라의 자생 및 재배종 배나무 속 식물이 중국배나 일본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개량이 이루어져 왔다고 생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배나무 속 식물은, 우리나라 특유의 종인 심실 2개의 콩배(P. faurie), 현재 재배되고 있는 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5심실의 돌배〔山梨: Pyrus serotina REHD.〕, 재래종 및 중국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산돌배〔北支 山梨: Pyrus ussuriensis MAXIM.〕 등이 기본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본종 외에 한국에는 콩배나무, 좀돌배나무, 백운산배나무, 꼭지돌배나무, 남해돌배나무, 청위봉배나무, 개위봉배나무, 위봉배나무, 금강산배나무, 산돌배나무, 털산돌배나무, 들배나무, 문배나무 등 10종 3변이가 전국에서 발견된 바 있다.
학명이 밝혀져 있는 한국의 재래종 배 품종은 8종 12변이종이 있는데, 그 중 청실리(靑實梨)는 극만생종으로 함흥이 원산지인데 단맛이 뛰어나고 석세포가 많아 씹을 때 오돌오돌한 느낌을 주며 저장하면 더욱 맛이 좋아진다. 청실리는 1970년에 농촌진흥청에서 육성한 맛이 좋은 단배의 교배친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기록상 한반도의 배나무 속 식물은 17세기 허균의 저서인 「도문대작」에 5품종이 나오고 1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완판본 춘향전에서는 청실배(청실리) 라는 이름이 나오며 구한말에 황실배(황실리), 청실배 등과 같은 명칭이 있다. 1920년대의 조사 자료에는 학명이 밝혀진 재래종과 학명이 밝혀지지 않은 26품종 등 총 33품종이 나타난다.
송(2008)은 한반도의 자생 또는 재래종 배나무 속 식물은 50여종 또는 품종으로, 그 중 20여종 또는 품종에 대해서만 학명이 밝혀져 있을 뿐 나머지는 그 분류 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한반도의 재래종은 대부분 산돌배에서 유래된 것이 많으며 재배품종은 돌배나무에서 유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Uchiyama(1923)은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강원도, 경남 등지에서 수집되어 권업모범장에 식재되어 있던 재래종으로 과동리, 임금리, 청실리, 병배, 합실리, 돌배나무, 천설리, 청당리, 문전리, 청사리, 수향리, 고사리, 마분리, 함흥리, 봉화리, 청리, 청당로리, 석리, 참배, 조리 등을 정리한 바 있으며 또한 일본의 Ueki(1936)은 경기도(수원, 화성)에서 산돌배나무, 장비리, 추리, 평리, 청실리, 황리, 문배, 장문배, 반황리, 병배, 삽리 등의 재래종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들 재래종 중 황리, 병배, 청리, 고사리, 함흥리, 합실리, 봉화리 등은 우량 품종, 청당로리는 왜화성 대목으로 유용하다고 평가하였다(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1931). 청실리, 추향리, 합실리 등의 재래종은 분포지역 확인이 불분명하다. 이는 변이 또는 자연 교잡에 의해 또는 육성종의 보급으로 인해 점차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배나무 재래종의 명산지는 봉산, 함흥, 안변, 금화, 봉화현, 수원, 평양 등으로 알려져 있고, 품질이 우수한 재래종으로는 황실리, 청실리, 함흥리, 봉화리, 합실리, 무심배, 사탕배, 문배 등이 있다. 주요 재래종의 형질 특성은 다음과 같다.
♣ 황실리(화실레, 황실네, 황실배, 황색리)
세력이 매우 강하다. 열매는 도란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도란형이다. 열매 껍질은 점차 밝은 황록색이나 황갈색으로 변하며 겉에 작은 검은빛 반점이 있다. 햇빛을 받은 열매껍질은 짙은 황갈색이나 갈적색을 띈다. 열매무게는 보통 250~300g 이지만 크게 자란 것은 580g정도이다. 감미와 향기가 강하고 장기 저장이 가능하다.
♣ 청실리(청실레, 청실네, 조선배나무, 청실배, 청색리)
세력이 왕성하고 결실이 좋다. 열매는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도란형이며, 보통 길이 4~6㎝, 지름 4~5㎝이지만 큰 것은 지름 7~13㎝이다. 크게 자란 것은 열매 무게가 540g 정도이다. 과육은 즙이 많으며 약간 떫고 신맛이 많다. 청실리는 예전에 구리시 묵동리에서 재배가 성행하였는데 석세포가 적으면서 감미가 높고 맛이 뛰어나 구한말까지 왕실에 진상되었다.
♣ 추향리(취앙네, 추안네, 취앙레)
열매는 길이 4~6㎝, 지름 4~5㎝로서 약간 신맛이 있으나 과육이 연하다. 열매 껍질은 짙은 누런빛 또는 황갈색이지만 햇빛을 받은 면은 붉은 빛을 띈다. 내한성과 내병성이 매우 강하다.
♣ 문배나무(문배, 큰 돌배나무, 황돌배나무)
꽃이 크다. 열매는 난상 원형 또는 원형이며 지름 3~4㎝이다. 열매 껍질은 황갈색이다. 1035년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지금도 기준 표본목으로 남아있다.
♣ 합실리(합실레, 합실네)
열매는 편원형이며 지름 3~5㎝이다. 열매 껍질은 갈색이다. 과육은 석세포가 많아 굳으며 떫고 신맛이 있으나 먹을 수 있다. 청당로리 과육은 단단하고 치밀하며 석세포와 섬유질이 많고 과즙량은 적으며 산미가 있다. 과심은 광방추형에 가까우며 크기는 중~대과이다. 수확시 과실에 꽃받침이 남으며 육경은 없다. 과중은 270g내외, 과형은 난형, 과피는 황갈색으로 당도 10°Bx이다.
♣ 무심이(無心梨)
몇 년 전만 해도 배꽃이 피는 4월이면 인제군 인제읍 상동 5리 최광윤 씨의 집은 온통 눈송이처럼 하얀 배꽃으로 덮여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었다. 6.25 직후에 심은 50여 년생이나 되는 근경이 25cm 정도인 무심이 배나무 세 그루가 안마당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쇠하여 예전과 다르게 배도 덜 달리고 수형도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다. 무심이는 예로부터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잘 되는 배로, 열매가 아이들 주먹 크기 정도로 배 중에서는 작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노르스름한 황갈색에 속이 작고 씨가 거의 없으며 서리를 맞으면 새콤하면서도 달고, 껍질이 얇고 연하여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배로 유명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무심이는 만생종으로 첫눈이 내릴 때쯤이 수확 적기인데 저장성이 뛰어나서 왕겨에 묻어두면 이듬해 여름까지 지날 수 있어 귀한 손님 접대엔 그만이었다. 무심이는 Pyrus 속(屬)에 속하지만 그 종명(種名)이 무엇인지 확실히 연구된 바는 없다.